[뉴시안=양지열 편집 자문위원/변호사]

현재진행형 사건

“유재석씨 얼굴이 앳되 보이네, 디지털이 아닐 땐 화질이 저렇게 흐렸나, 뉴스의 남자 앵커보다 여자 앵커 나이가 더 많을 수도 있구나…”

국정원과 군의 국내정치 개입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매일처럼 쏟아지는 문건들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북한을 상대해야 했던 사이버 사령부, 기무사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무슨 짓들을 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야권 성향의 정치인은 물론 언론인, 연예인, 학자, 시민 운동가들의 입을 막기 위해 “요원들”이 키보드 전쟁을 벌였다. 아예 일자리를 빼앗아 생계를 가로 막기도 했다. 제도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문건들은 예상을 뛰어 넘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고 있다. 모두 명백한 범죄들이다. 그런데 화살표들이 지난 정권의 핵심을 가리키기 시작하면서 정치권에선 “정치보복”이라는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과거를 들추는 퇴행이라며 용서와 화해로 미래를 얘기해야 한다고도 한다. 수사는 이제 시작했는데,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는 구성원들의 파업으로 지금 지상파 TV에서는 재탕 방송을 틀고 있는데. 벌써 잊어야 할 지난 날이라는 것일까.

국민이 피해자

“보복”이라는 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번갈아가며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 쓰는 말이다. 누군가 먼저 상처를 입혔고, 때를 기다려 그 만큼을 되돌려 주는 일이다. 한 때는 밀렸더라도 힘을 키워 받은 만큼 갚는 일이다. 부모님의 원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며 산 속에서 칼을 갈아 돌아오는 옛날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말이다.

누가 누구로부터 어떤 상처를 입었던가. 낯설기에 불안했던 광우병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쏠렸고 언론사는 심층 취재를 했다. 그 과정에서 SNS에 개인적인 의견을 올린 여배우도 있었다.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고, 수입협상도 다시 해야 했다. 그 덕분에 30개월을 넘지 않은 소고기를 먹게 됐다. 위생검열이 엄격해진 덕분에 꼭 광우병이 아니더라도 더욱 안심할 만한 먹거리가 들어오고 있다.

물론 정권의 입장에서 불편한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앞장 서 문제를 제기했던 보도팀은 해체됐고, 결혼식을 앞둔 PD가 수갑을 차야 했다. 방송국 전체가 도축되는 소처럼 산산조각이 났고 아나운서, 기자, PD들이 마이크를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악플에 시달리던 여배우는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잡아 가두고 때려서 고문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어찌보면 더욱 가혹한 일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이 생업이었을 뿐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그들이 입은 피해를 드러내는 것이 보복이라면, 누가 어떻게 입은 피해에 대해 누가 보복을 한다고 봐야 할까.

방법도 상상 이하의 수준이었다. 배우 문성근씨의 사진을 합성해 만들어 낸 수치스러운 사진이 대표적이다. 자신들도 낯 뜨거웠던 것일까. 혹시라도 유포하는 사실을 들킬까봐 도청감지 장치까지 동원했단다.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여론조작 방법도 그랬다. 포털 뉴스에 반대하는 비율이 높으면 “요원들”을 동원했다. 딱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밤새 여러 개의 아이디를 동원해 찬성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아침에 포털을 통해 여론을 접하는 국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러려니 해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돈은 세금, 그러니까 국민이 낸 돈으로 충당했다. 이래저래 국민 전체가 피해자였던 셈이다.

보복이란 권력을 쥔 자들끼리의 칼부림에나 어울리는 말이다. 국민이 입은 피해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문성근씨의 합성사진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쉽게 지울 수 없는 찝찝함을 묻혔다.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말해줬다. 상처입은 국민의 마음을 씻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을 섬겨야 할 정치권이라면 진영을 떠나 앞장서야 할 의무가 아닐까.

이제야 말 할 수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삼았다. 할머니가 늦깍이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들은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닫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직접 폭로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은 그런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할머니들이 원하지도 않는 돈과 “불가역적 합의”를 바꿨다. 이제야 어떤 적폐가 있었는지 국민들이 알기 시작했는데 용서와 화해부터 꺼내는 일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생계를 걸고 파업을 시작한 언론사 구성원들이, 자신이 낸 세금으로 자신을 비방하는 댓글들을 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예인들이,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정책들이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진실을 이제야 알게 된 국민들이,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전직 국정원장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와 함께 실무를 총괄했던 심리전단장 역시 재판을 받고 있다. 당시 군 수뇌부들이 줄줄이 수사를 받고 있다. 사건의 핵심에 누가 서 있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몰랐더라도 그들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벌써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반성과 사과는 나오질 않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측근으로부터 대통령이 얼마나 바쁜데 그런 일들에 신경을 썼겠느냐는 볼 멘 소리는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들이라. 십년 가까이 고통을 겪었던 피해자들의 눈물 앞에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여배우는 가장 화려해야 했을 20~30대를 악플과 싸우며 버텼다. 묘비에 조차 “웃기고 자빠졌네”라 쓰고 싶었다는 개그맨이 분노와 쓴 눈물을 삼켰다.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그런 고통을 겪었는데 설마 사소한 일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

법을 두고 죄를 묻는 이유는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고,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최소한 누구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야 용서도 화해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금도 바라는 것처럼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제대로 된 청산을 찾아보기 어려운 역사를 지내왔다. 그래서 힘든 일일 수 있다. 이번에도 좋은 게 좋은 일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고 싶을 수 있다. 권력이 백년 갈 줄 아느냐며 노골적으로 “보복”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 말로 과거로의 퇴행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으로 남들은 하지 않을 “무한도전”을 보여주던 예능 프로가 몇 주째 도전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정치권이 먼저 미래를 향한 “무한도전”을 보여주면 어떨까.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필자 양지열 변호사

- 변호사. 평론가

- 고려대 철학과

- 중앙일보 기자(1996년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 서울중앙지검 형사조정 위원

- 국민안전문화협회 고문 변호사

- 한국출판문화산업 진흥원 포상금 심의 위원회 위원

- 뉴시안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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