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최영일 편집 자문위원/시사평론가]

신의 한 수, 10.20 공론화 위원회 정책권고안 발표

오전 10시, 필자는 정부방송인 K-TV 상암 스튜디오에 앉아 김지형 위원장이 발표하는 공론화 위원회의 결론을 듣고 있었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달랐다. 의외의 우승자가 발표 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결과를 생중계로 보는 느낌이었달까?

19%p라는 꽤 큰 격차로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재개를 권고하였다. 약 3개월 간 4차에 거친 공론조사 과정에서 2030 시민참여단의 견해가 많이 바뀌었다는 해석도 곁들여졌다. 이러한 결정이 나온 이유로 경제성, 안정성 등이 거론 되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 종합공정율 29.5% 건설이 진행된 신고리 5, 6호기를 계속 건설해서 가동하라"고 결정한 바로 그 시민참여단이 우리의 미래에 원전은 축소되어야 한다, 즉 어느 시점엔가는 원전제로에 도달해야 한다는 탈원전 방향성에 대해 53%의 꽤 압도적인 입장을 동시에 보였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바뀌는 것일까?

문재인정부는 탈원전 정책에 따라 2080년을 한반도 원전 제로 시점으로 제시하였다.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이 영구중단으로 결정 되었다면 내년부터 가동되는 신한울 1, 2호기가 한반도 마지막 원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한울 1, 2호기는 설계수명 상 2079년 가동을 멈추게 된다. 그런데 신고리 5, 6호기가 건설을 재개하게 됨으로 2022년에서 2023년쯤 가동에 들어가게 되면 설계수명이 60년이기 때문에 2082년까지 가동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2082년 원전제로에 도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후 더 이상의 원전이 건설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 계획 상에는 존재하지만 아직 건설에 들어가지 않은 신한울 3, 4호기는 설계단계에서 진행이 중단되어 있다.

글로벌 에너지 전쟁에서 우리의 위치는?

약 24기의 원전이 열심히 핵분열 반응을 일으켜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을 세계적 추세와 비교해 보도록 하자. 전세계에는 약 400여기의 원전이 돌아가고 있다.

역시 미국이 가장 많다. 100기 내외가 된다. 그 뒤를 러시아, 프랑스, 일본, 중국이 따르고 있고,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원전 국가다. 이어서 인도, 캐나다로 이어진다. 프랑스는 58기로 상당히 많은 원전을 돌리고 있지만 유럽 전체가 약 130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유럽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특이한 상황이다. 유럽국가들 간에는 전력을 서로 팔고 산다는 사업적 특징도 감안하도록 하자.

우리나라의 별스러운 점이 보이시는가? 다시 말해 미국, 러시아, 유럽, 중국, 인도, 캐나다는 모두 국토가 매우 넓은 대륙국가들이다.

오직 일본만 바다로 고립된 섬나라인데 40여기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의 원전은 이러한 일본식 모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던 중이다.

원자력 발전으로 전력을 공급해온 역사 약 반세기 동안 대표적인 사고는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섬 방사능 누출,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사건, 그리고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대사고이다. 대표적 원전국가에서 대표적 사고가 일어났다. 통계적, 확률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문제는 원전 전문가들의 견해를 따르면 이 사고들은 확률적으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확률이 너무 희박해 거의,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문제는 원전 보유 및 가동, 세계 6위의 국가가 바로 한국인데 원전 밀집도는 부동의 세계1위라는 점이다.

에너지 공급정책에서 원자력이 답일까?

우리는 왜 그동안 원자력에 집착해온 것일까? 현재 전 세계의 에너지 공급원을 분석해 보면 여전히 화석연료의 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 이 빅3가 에너지 공급원으로 90%에 육박한다. 이어서 수력발전이 6%대, 원자력은 5%대, 신재생 에너지가 1% 공급 비중을 차지한다.

필자가 어린 시절, 청소년 잡지를 보면 20세기 말, 21세기 초면 화석연료는 고갈될 것이므로 에너지 위기가 몰아닥칠 것이라는 예언(?) 기사가 주를 이뤘다. 지금 벌써 2017년인데? 당시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생활 등은 30여년 후를 내다보지 못하고 오보를 쏟아내 소년소녀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 국가의 백년지대계 중 하나인 중장기 에너지원의 정책적 결정에 ‘공포’ 변수가 오랜 기간 작동해 온 것이다.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원자력은 위험하다’는 가장 공포스러운 사실을 또다른 공포 변수, 예컨대 원자력을 포기하면 전기값이 폭등할 것이다, 또는 원전을 축소해 나가는 속도를 신재생 에너지의 개발이 따라오지 못하면 미래의 어느 시점 전력공급이 중단될 것이다, 라던가 하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위험에 대한 공포가 재난 공포 보다 더 클 수 있다는 놀라움이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한, 재난은 확률적으로 오지만 생존은 생활이다, 라는 그간의 정치논리가 만들어 온 관념 때문 아닌가 싶어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상대성 원리를 정리 해내고, 그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탔을 뿐 아니라 20세기 과학의 심볼이 되었던 아인슈타인은 2차대전 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팻맨과 리틀보이를 투하하자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1902년에 논문들을 다 찢어버렸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

응? 지금까지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를 했지, 원자폭탄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그 차이는 북한이 ICBM을 우주개발용 로켓이라고 우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기권 밖으로 쏘면 로켓이고, 지구상 어느 지점을 겨냥해 쏘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이듯 원자력이 전력공급원이냐, 전쟁무기냐는 정권의 선택사양일 뿐 중요한 핵심은 여전히 ‘위험하고’, 그 위험은 제한적으로만 통제될 수 있다는 점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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