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대자연 ‘아프리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국가. 야생동물들이 떼 지어 움직이는 장관, 용맹을 떨쳤다는 마사이족 전사, 아름다운 인도양,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그려낸 석양, 그리고 지구상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 나라. 바로 케냐이다.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막장으로 치닫는 국가가 많은 아프리카에서 케냐는 그나마 안정적인 곳이다. 내전, 특히 아프리카 내전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그 무자비함에 혀를 내두르는 시에라리온이나 콩고 같은 서중부 서브사하라(Sub-Sahara) 국가들에 비해, 케냐의 폭동과 소요는 귀여운 수준이다. 그런 케냐에서 나름 큰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 8월 8일 치러졌던 케냐의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자 주빌리당의 후보인 우후루 케냐타가 54%의 득표율로 45%를 얻은 국민슈퍼동맹(NASA)의 라일라 오딩가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오딩가 후보는 2007년과 2013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그 때마다 부정선거 의혹이 있었다. 2007년 선거 후폭풍은 특히 심해서, 시위 과정에서 무려 1,000명이 넘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올해 선거 역시 오딩가 후보가 케냐의 선거관리 위원회의 전산망이 해킹을 당했고 이를 통한 조직적인 선거결과 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혼란에 빠졌었다. 그러던 중 9월 1일 케냐 대법원에서 야권과 오딩가 후보의 이의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8월 선거결과를 무효화했고, 60일 내 재선거를 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새로이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된 날짜가 바로 얼마 전이었던 10월 26일이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케냐의 대통령 재선거는 파행으로 끝났다. 야당의 오딩가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인사 교체 등과 같은 선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부정선거는 여전할 것이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강력한 라이벌 후보 없이 치러진 케냐 제2대선은 34.5%의 지극히 저조한 투표율을 보였다. 현직인 케냐타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다 할지라도 그 정통성은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투표 당일 일어난 무력시위와 진압으로 인해 자칫 큰 유혈사태로 접어들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불과 한 달 전 많은 이들은 케냐가 아프리카의 모범적인 민주사회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한국인에게 아프리카 대륙은 알 수 있는 기회도 적고, 사실 그다지 알고 싶은 마음도 안 드는 곳일 터이다. 기아와 질병, 수탈과 끊임없는 내전으로 인해 고통 받는 대륙. 측은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지만, 그 참혹한 비주얼 때문에 더더욱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곳이리라. 아니면 다달이 보내는 몇 만원의 후원금으로 양심을 치유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1960년대만 하더라도 수많은 개발경제학자들이 향후 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들 혹은 지역으로 아프리카를 지목했었다.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 그야말로 매력적인 투자처였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렸고, 오히려 자원이고 뭐고 쥐뿔 볼 것도 없어보였던 동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바로 타이완, 홍콩, 일본, 싱가폴 그리고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었다. 이제는 아프리카를 두고 ‘자원의 저주’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지나치게 풍부한 자원들 때문에 오히려 강대국과 다국적기업으로부터 무차별적인 착취를 당해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아프리카의 무지막지한 독재자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도대체 이 대륙은 무엇 때문에 이 지긋지긋한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을 끝내지 못하고 있을까?

1990년대에 아프리카의 비참한 상황을 연구하던 이스털리(Easterly)와 동료 학자들은 고질적인 아프리카의 정치 불안정, 그리고 그로 인한 경제 후퇴를 민족적 혹은 부족적 다름을 고려하지 않은 국경선 설정과 잦은 분쟁을 꼽았다. 물론, 바둑판같은 국경선은 서구 열강들이 그려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계속되어진 연구에서 흥미롭지만 슬픈 사실을 밝혀냈는데, 이러한 부족 간의 분쟁은 400여 년간 지속됐던 노예무역에 기인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이나 북미, 사하라 이북 지역에 노예를 팔고 대가로 총을 받는 수출입 방식을 총과 노예 사이클(Gun-Slave Cycle)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노예를 파는 쪽은 아프리카 주민들이고 총을 파는 쪽은 서구 노예상들이다. 더 많은 노예를 팔기 위해 한 부족은 다른 부족을 습격하기도 했고 전쟁을 통해 포로를 확보해서 거래했다. 나중에는 부족 끼리 뿐 아니라 심지어 부족 내에서도 족장의 명령에 의해 ‘노예사냥’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 노예사냥에는 서구의 노예상들에게서 얻은 총과 무기가 사용됐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노예수출이 잦았던 서쪽 해안가의 아프리카 부족 간에는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노예사냥이 성행했고, 당연히 부족들 간의 적대감은 어마어마했다. 이러한 경험은 ‘외부인’에 대한 지독한 경계심을 만들어냈다. 나의 집안의 선대를 노예선에 태운 부족과 한 국가를 형성하고 서로 협력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라니. 또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고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역사가 남긴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종종 아물기 전에 더 큰 상처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다음 역사의 사회와 정치, 경제에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이루어진 비극이라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비극의 책임을 한 쪽만 지고 있다는 점이다. 웅장한 자연과 아름다운 로맨스가 흘렀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마저도 듣기 미안한 밤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