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프로야구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10월이 지나갔다. 코리안 시리즈와 함께 미국 메이저 리그의 월드 시리즈도 막을 내렸다. 이번 월드 시리즈는 내셔널 리그의 챔피언인 로스 앤젤러스 다저스와 아메리칸 리그의 챔피언인 휴스턴 아스트로스가 맞붙었다. 강력한 타격라인을 내세우는 아스트로스와 철벽 마운드(라 여겼던) 다저스 간의 대결.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휴스턴 아스트로스가 창단 이후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시리즈가 한창 진행되던 3차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아스트로스의 구리엘 선수가 다저스 선발투수인 다르빗슈 선수에게서 홈런을 뽑아낸 다음 덕아웃에서 자신의 양쪽 눈을 손가락으로 찢으며 인종차별적 행동을 보인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르빗슈는 아버지가 이란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인, 일본 출신의 혼혈 선수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월드시리즈가 진행되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서 구리엘 선수에게 내년 시즌 시작하자마자 다섯 경기 출장금지 징계를 내렸다.

농구나 미식축구처럼 흑인 선수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지 않아서일까.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인종차별 및 비하 문제는 늘 있어왔다. 월드 시리즈처럼 전 세계 야구팬들이 지켜보고 있는 큰 경기에서야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시즌 중에는 흔한 일이다. 최근 가장 유명한 사건은 2016년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서 있었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에서였다. 오리올스의 외야수인 아담스 존스 선수에게 레드삭스의 팬 한 명이 땅콩 봉지를 던지면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 관중은 당장 야구장을 떠나야 했고, 평생 펜웨이 파크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이른바 블랙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 이후 이어졌던 증언들이다.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 투수인 C. C. 사바시아 선수는 펜웨이 파크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고 인터뷰를 했고, 많은 유색인종 메이저 리거들이 펜웨이 파크에서 경기를 할 때에는 으레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생각나는 선수가 한 명 있다.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 로스터에 첫 흑인 메이저 리거로 등장했던 재키 로빈슨이다. 엄밀히 따지면 첫 흑인 메이저리거는 아메리칸 리그의 전신이었던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톨레도 블루 스타킹스의 모세스 플릿우드 워커(Moses Fleetwood Walker)이다.

하지만 야구가 미국인들의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후 최초의 흑인선수는 누가 뭐래도 재키 로빈슨이다. 구장으로 뛰어 들어간 재키 로빈슨은 숱한 모욕과 인종차별, 심지어 살해협박을 이겨내며 기록들을 쏟아냈다. 데뷔 연도인 1947년에는 12개의 홈런과 도루 29번, 0.297의 타율로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1949년에는 내셔널 리그 MVP에 올랐다. 1962년에 흑인으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고, 이제 매년 4월 15일은 재키 로빈슨 데이로 선정되었다. 이 날 모든 선수들이 30개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된 로빈슨의 42번 등번호를 달고 경기를 한다. 그야말로 전설이 된 것이다.

물론, 재키 로빈슨이 전설이 된 배경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 있다. 아직도 남부에서는 흑백분리정책이 법적으로 허용되던 시대에 용감하게 로빈슨을 기용했던 브랜치 리키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이다. 브랜치 리키가 왜 굳이 흑인 선수를 영입하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흑인 관중을 끌어들여서 구단 수입을 높이려는 전략이었다고도 하고, 뛰어난 유색인종 플레이어가 공정한 기회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 인류애가 넘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첫 라티노 플레이어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로베르토 클레멘티를 피츠버그 파이럿츠(Pittsburg Pirates)로 끌고 온 것도 브랜치 리키였다. 사업적 이윤이었든 인류애였던, 프로의 세계에서는 피부 색깔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스카웃한다는 원칙만큼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리엘 선수의 인종차별적 행동에서 시작해서 재키 로빈슨, 브랜치 리키까지 언급하는 것은, 다양성이 보장되고 개방된 사회가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를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민권운동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대법원 판결부터였다. 남부의 흑백 분리정책으로 인해 집에서 가까운 백인 학교가 아닌 먼 곳에 있는 흑인 학교에 아이를 통학시켜야 했던 브라운씨가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이다.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브라운씨의 손을 들어줬고, ‘교육기관을 분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separate educational facilities are inherently unequal)’는 유명한 판결 문구를 남겼다. 그러고도 10년이 지난 1964년에서야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됐고,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사회는 인종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요즘 말로 그 힘든 일을 브랜치 리키는 민권법이 통과하기 거의 20년 전에 해냈던 것이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거는 야구라는 운동의 세계에서. 메이저 리그는 이후 전 세계인의 스포츠 리그가 되었다. 물론, 텔레비전의 등장과 보급, 중계권 등은 엄청난 수익을 올려주는 중추적 역할을 했고, 여기에 뛰어난 마케팅 기술과 통계의 활용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과 피부색의 출중한 선수들이 뛰면서 게임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개방적이고 이동이 활발한 사회에서 눈부신 경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아세모글루와 로빈슨의 경제발전론을 운동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메이저 리그에서는 흑인선수의 비중이 줄어들고 라티노 선수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다. 히스패닉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모습이 겹친다. 그런데, 쿠바에서 건너온 구리엘이 인종차별적 행동을 했던 선수는 동양인이었고 그가 속했던 구단이 하필이면 브루클린에서 엘에이로 옮겨온 재키 로빈슨의 다저스였다니. 재키 로빈슨과 로베르토 클레멘티의 용감한 도전이 생각나서 더욱 씁쓸하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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