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최영일 편집 자문위원/시사평론가] 최근 흥미로운 두 가지 현상을 보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와 변화에 대해 곰곰 고찰할 기회를 가졌다.

평창동계올림픽 롱패딩 코드가 왜 난리람?

구스다운이 들어가고 종아리까지 내려와 한겨울 추위에도 우리의 체온을 훈훈하게 유지하는 롱패딩 코트. 젊은 층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것이 드디어 올 겨울, 시장 확대의 모멘텀을 맞았으니 평창동계올림픽 롱패딩 코트의 품귀현상이다.

심플하고 무난한 디자인에 과거 후진국스러운 요란한 로고나 장식 없이 ‘Passion, connected(하나 된 열정)’이라는 작은 문구만 들어있다. 이 제품은 평창올림픽 후원사인 롯데백화점이 3만 장 한정으로 제작 유통하는 것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1차로 2만 3천 장을 풀었는데 금새 동이 나 버렸다.

이 현상의 동력은 입소문 마케팅이었다. ‘가성비 롱패딩’이라고 불리면서 첫째, 동종 제품 가격에 비해 절반쯤 되는 14만9천 원의 저렴한 가격이라는 점, 둘째, 겨울철 부피에 비해 가볍고 따뜻한 구스다운 제품으로 솜털 90%, 깃털 10%의 충전도 만족스럽고, 셋째, 깔끔한 디자인에 최근 스타 연예인들이 걸친 모습이 많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2일, 2차로 7000개가 더 풀리지만 이미 자극된 구매수요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한 수량이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당일 소진될 것이며 운 좋게 구매한 사람들은 ‘득템’을 외칠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분석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대략 세 가지 이유는 마케팅 전략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다.

실제 소비욕구의 밑바닥에는 11월 중순, 예년보다 빠르게 갑자기 닥쳐온 겨울한파와 함께 두 가지 상반된 사회현상이 충돌하면서 상쇄가 아닌 상승의 효과가 발현 중이다.

하나는 석달 후로 다가온 평창 올림픽을 통해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축제욕망이 출렁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주 역사상 초유의 수능 연기사태를 일으킨 포항 지진에 대한 불안감이다.

사회적 불안과 패션시장의 관계는 전쟁시기에 민간의 옷차림은 화려하고 야해진다는 통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제 불확실성, 불안정성이 고도로 높아진 시대의 패션 트렌드는 실용성이다. 롱패딩 코트를 입어보면 캠핑족은 금방 안다. 이것은 침낭을 옷으로 변형한 것임을.

그리고 구스다운 롱패딩 코트 14만9천 원은 결코 싼 것이 아니며 이미 tv홈쇼핑에서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제품을 유사 가격에 안방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전화 한 통으로 구매할 수 있다. 다만 평창 로고만 없을 뿐이다.

롯데는 3만 장 이상 찍지 않겠다고 했으나 앞으로 더 제작해 유통시킬 것이라고 예견해 본다. 우리는 편의점 과자 허니버터칩 마케팅을 이미 겪어보지 않았던가.

역사상 최고가로 낙찰된 다빈치의 그림 한 점

한편 해외에서는 최근 크리스티 경매에서 다빈치의 것이거나, 다빈치가 참여한 화실의 공동작품이거나, 아니면 다빈치의 위작인 그림 한 점이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하찮은 가격인 45파운드에 팔렸던 그림이 2000년대 들어 1만 달러로 뛰었다가 2015년 역대 최고가를 찍었던 피카소의 작품 ‘알제의 여인들’이 기록한 1억7천490만 달러를 두 배 이상 뛰어 넘으며 무려 4억5천30 달러에 낙찰된 것이다.

이 사태를 놓고 미술계는 시끌시끌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진품인지 위작인지를 놓고 끊이지 않는 잡음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가 하는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전문가 비평은 미술품을 뻥 튀겨 절세, 또는 합법적 탈세를 하기 위한 고도의 수법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돈 자랑이 지나친 과시욕의 발로로 해석하는 입장으로 갈린다. 필자가 보기에 이 두 가지는 배치되는 분석이 아니다. 즉 절세의 기법으로 활용하면서 최고한도의 과시가 공존한다. 언젠가 이 그림을 낙찰 받은 호사가를 한 번쯤 인터뷰해보고 싶은 호기심도 든다.

그는 ‘남자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예수의 초상 ‘살바토르 문디’에 막대한 베팅을 했지만 어쩌면 진품이든 위작이든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음모론적으로 보면 앞으로 이 그림의 소유주는 이 그림에 베팅한 돈 보다 훨씬 소소한 비용을 들여 미술감정가를 휘둘러 이 작품을 진품으로 굳히고 더 상위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예술작품에 대한 경제적 평가란 결국 해석의 해석의 해석으로 이어지면서 흐려지는 것이고, 노이즈마케팅을 통해 수요가 창출되면 공급은 달랑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스터피스의 미술시장이다. 그가 누구이든 시장을 좀 아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롱패딩과 다빈치의 상관성은 무엇이길래?

국내외 두 가지 상관없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장사회’에서 이 두 사건은 연결되어 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시장관계는 수요와 공급의 접점에서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 두 사례 모두 공급자에게 있다. 그리고 21세기를 휩쓰는 복잡성에 근거한 논란 마케팅이 주효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축제의 희열을 갈구하는 심리와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는 불안감,

이 작품은 과연 다빈치가 그렸을까, 참여했을까, 아예 상관없을까,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들. 현대의 경제심리는 단선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파장이 서로 상쇄되어 소멸되는가, 상승효과를 일으켜 한 없이 커지는가, 나비효과에 달려 있다.

차이점도 있다. 롱패딩 코트는 소모품이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사회가 도래하기 전, 과거의 의류는 내구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몇 년 보관하고 겨울마다 입는다 하더라도 파손 때문이 아니라 유행과 트렌드 때문에 의류는 결국 버려지거나 어딘가에 쳐 박힌다.

반면에 미술품은 소장품이다. 소모품과 소장품의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진다. 바로 이 지점에 우리가 무엇에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 있다.

투자가치를 선별하고 결정하는 주요 요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가기로 하겠다. 하지만 이 칼럼의 결론에 필자는 위에서 풀어온 논리와 전혀 다른 반전의 결론을 내릴까 한다. 평창 롱패딩을 사는 것은 그뤠잇, 그런데 살바토르 문디를 호기롭게 산 그 구매자는 스튜핏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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