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역사는 숱한 씨줄과 날줄의 조합이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건들도 되돌아보면 순간의 우연이 방아쇠를 당긴 경우가 적지 않다. 우연이 잉태한 필연이라고나 할까.

파란과 격동의 시기를 헤쳐 온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해방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까지, 현대정치사는 실로 숨 가쁜 길을 걸어왔다. 그 순간순간마다 우연적인 요소가 있었고 그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필자는 이에 주목해 격주로 연재할 기획 기사 제목을 ‘우연이 바꾼 한국현대정치사’로 잡았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해방 직후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며 임시정부 홀대로 이어져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하 김구)이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1945년 8월 10일, 중국 서안에서였다. 김구는 당시 국내로 진입하기 위해 O.S.S(미국전략정보기구.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 특수 훈련을 마친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중국 서안에 와 있었다. 2지대 대원 50명은 1945년 7월말, 3개월 간 특수 공작 훈련을 마치고 함경도에서 남해까지 지역별로 공작반을 편성해놓고 8월 20일 안에 국내로 잠입할 계획을 짜놓은 상태였다.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무기와 무전기, 조선은행권, 가짜 증명서, 신발, 국민복 등 모든 준비를 마치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김구는 서안에서 이범석 광복군 2지대장(호 鐵騎.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 등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선언은 5일 뒤인 8월 15일 있었지만 사실상의 항복 선언은 이날 8월 10일이었다.

당시 중국 장개석 정부는 일제가 1946년 말 쯤에 항복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임시정부나 광복군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일제의 항복 선언은 기쁜 일이었지만 임시정부로서는 채 광복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범석은 1966년 희망출판사가 펴낸 정치비사집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에서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국내 진공의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시 광복군은 5만 명이나 되어 어느 정도 힘도 있었다. 1945년 8월 10일. 국내 진공을 위한 서안 광복군 활동을 시찰 왔던 김구 이하 임정요인과의 저녁 식사 때 중경에서 장개석 총통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역 수만리 밖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는 기쁨, 다시 싸울 만반의 태세는 되어 있었건만 우리는 이긴 것이다. 가슴 한 구석에 허탈감을 간직한 채 우리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생전의 김구 모습. 사진=포털 다음

김구, “광복군 대원들을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키라” 지시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특수 훈련을 받은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을 일부라도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키라는 지시였다. 우리 손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가만히 있다가는 향후 조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 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1945년 9월1일, 한국 관할권 태평양전구로 바뀌며 맥아더 등장

즉시 이범석 2지대장을 중심으로 ‘국내 정진군(挺進軍)’을 만들었다. 당시 광복군 2지대는 주중 미국 공군사령관 웨더마이어 장군과 교섭한 뒤 미국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펼쳐오던 터였다. 군복, 군화 등이 모두 미제였다. 이범석은 미국 측에 국내 정진군이 편성된 경위를 설명했다. 2지대에 파견된 O.S.S(미국전략정보기구) 책임자였던 써젠트 미군 소령은 이에 동의해 중국 곤명에 있던 미군사령부에 이 사실을 타전했다. 중국전구 미군사령부는 서울로 들여보내는 ‘미군사절단’에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등 광복군 4명이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서안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3시간여를 비행해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다시 서안비행장으로 되돌아왔다. 일본 동경만에 진입하던 미국 항공모함이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귀환 명령을 받은 것이다. 18일 아침 22명(미군 18명+ 광복군 4명)을 태운 미군 C47 수송기는 서안비행장을 이륙해 오전 11시 18분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다. 하지만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비협조에 19일 오후 2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하기 시작한 것은 8월 28일부터이다.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8월 30일이다. 일본이 미국 전함 미조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사인한 것은 9월 2일이었다.

일본이 항복 문서에 사인하기 하루 전인 1945년 9월 1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이 미국에서 내려졌다. 한국을 담당하는 미군의 관할권이 중국전구(中國戰區. 사령관 웨드마이어)에서 태평양전구(太平洋戰區. 사령관 맥아더)로 이관된 것이다. 국내 정진군 활동을 지원하는 등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중국전구의 웨드마이어 장군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대신 임시정부와 특별한 관계가 없던 태평양전구의 맥아더 장군이 새로이 실력자로 등장했다.

참고 이미지=백범 김구가 쓴 자서전 /출판사 매월당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 진씨는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미국의 중국전구에 속해 있던 한반도가 종전 후엔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거든요. 미국과 협상이 늦어졌어요. 웨드마이어 사령관은 임시정부에 우호적이었는데, 맥아더 사령관과는 처음부터 새로 연락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중국 장개석(蔣介石) 총통을 통해 ‘임시정부를 한국의 과도정부로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맥아더 사령관은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으니 임정을 한국 정부로 승인할 수 없다’고 했어요. 임정에서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개인자격으로 환국할 것이냐를 놓고 찬반 격론을 벌였죠.”(2005년 8월12일 조선일보 인터뷰)

한국에 대해 잘 몰랐던 미국의 이러한 결정은 향후 임시정부에 대한 홀대로 이어지고 해방 정국을 미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미국파’인 이승만의 부상으로 연결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대로 미군 중국전구가 한국에 대한 관할권을 갖고 광복군의 국내 진공이 일부라도 해방 직후에 이루어졌다면 해방 후의 정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의 관할권 변화는 김구의 정치적 운명뿐만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사건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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