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유고슬라비아. 이미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구소련의 공산블록에 속해 있었던 탓에 한국인에게는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중장년 세대에게는 겨울왕국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동유럽의 도시 사라예보와 1984년의 동계 올림픽이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마법 같았던 눈 속의 겨울왕국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로 남았다.

1991년 발발해서 1999년이 되어서야 끝난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 전쟁 이후 갈갈이 찢어진 뒤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내전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하는 이들마저도 종종 있다. 현재 유고연방은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의 여섯 국가로 쪼개졌고, 2008년에는 코소보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코소보 독립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으며, 특히 유엔 상임이사국 중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독립국가로의 길이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사라진 국가에서 있었던 전쟁이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당시 보스니아 인종청소에 앞장서고 진두지휘했던 A급 전범 3명 중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라트코 믈라디치의 재판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이름은 들어봤음직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이미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2001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복역하던 중 2006년 사망했다. 두 번째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 역시 2011년 도주 중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형을 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범이었던 믈라디치가 지난 11월 22일 헤이그에서 열린 공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가장 참혹하고 인간성을 말살한 전쟁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기간에 걸쳐 유고연방의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가장 심각한 반인류적 범죄가 벌어진 곳은 보스니아 내전에서였다. 1991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연방 탈퇴와 함께 독립을 선언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역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기에 나선다.

문제는,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는 각각 크로아티아계와 슬로베니아계 주민이 90%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민족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묘하게 민족적-종교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보스니아에는 보스니아계 무슬림, 세르비아계 정교회, 크로아티아계 카톨릭이라는 세 집단이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유고연방에서 독립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에서 나온 것이었고, 세르비아계는 이에 반발하며 대치하였다. 세르비아계인 밀로셰비치가 이끌던 당시 유고연방 중앙정부에서는 독립 요구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대신, 민병대와 의용군을 조직하여 대응하도록 했다. 민병대와 의용군을 이용한 것은, 군법에 의해 훈련받고 최소한의 전쟁규범을 교육받은 군인과 달리 이들에게는 무차별적인 학살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무지막지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피해자는 주로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이었다. 무슬림 남성들은 대량살상의 주타겟이 되었고, 여성들은 강간당했다.

특정 종교 및 민족 집단을 대상으로 했기에 ‘인종청소’라는 말이 유래된 대학살이었다. 이 중 가장 잔학한 살상이 이루어졌던 곳은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이었다. 무슬림 남성 8,000명 이상이 살해됐고 여성들은 집단 강간을 당하면서 세르비아계 혼혈아를 낳게끔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감금되었다. 보스니아 무슬림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이 잔학행위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이번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다.

주요 세 전범이 모두 형이 집행되거나 사망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독립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여전히 세 민족으로 구성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조금은 불안정한 정치 시스템을 통해 큰 사고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세력이 점점 부상하고 있고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언제 힘을 얻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 유지되는 불안한 평화이다. 무엇보다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위험한 도화선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유럽이 2차 대전 이후 희대의 전범국가인 독일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독일 내에서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 덕분이다.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하려는 절실한 노력이 진의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경우는 다르다. 얼마 전 워싱턴포스트에서 보도한 세르비아인의 유고 내전에 대한 인식을 보면, 내전 당시 대학살이 있었다고 믿는 세르비아인은 40%밖에 되지 않았고, 이것이 전쟁범죄라 여기는 비율은 33%였다. 놀라울 정도로 선택적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선택적 기억은 수많은 ‘기록’과 ‘증인’을 통해 간단히 부정된다. 그러나 가장 큰 아픔은 기록으로 남은 잔혹한 실상이 아니다. 보스니아 내전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은, 서류가방을 들고 반갑게 아침인사를 하며 출근하던 옆 집 아저씨가 어느 날 총을 들고 군복을 입은 민병대가 되어 엄마와 누나를 강간하고 아빠를 사살하는 것을 목격한 기억이다.

선량한 이웃이 악마가 되는 모습을 두려움에 떨며 보아야 했다는 것. 잘난 계몽철학자들이 떠들던 인류애가 참담하게 말살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평화는 블랙코미디가 되었다. 그런 이들에게 믈라디치의 종신형 선고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에 대해 과연 일말의 희망이라도 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고 살아온 인류는 어쩌면 근거 없이 낙관적이기만 한 종(種)일지도 모르겠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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