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대중문화 콘텐츠들을 연구할 때 롤랑 바르트는 ‘신화’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모든 콘텐츠에는 문화를 공유하는 인간 집단 안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내러티브가 숨겨져 있다.

그것이 ‘신화’며,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수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용자들은 이를 그 시대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능동적으로 해석하면서 수용한다. 시대정신에 민감한 창작자들은 이미 창작 당시에 능동적으로 해석된 내러티브를 콘텐츠 안에 담는데, 이럴 경우 대중들 사이에선 이런 해석이 원본의 힘을 누리며 적극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좀비 이야기 역시 ‘신화’다. 이 신화에는 영혼 혹은 이성이 없는 노예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는데,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라면 노예를 부리는 자들의 욕망이 ‘능력’으로 해석되거나 그들을 경외하는 사회다.

하지만, 좀비들이 평범한 인간을 공격한다는 스토리를 쓰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그 욕망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한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수용된다면 그 사회가 공유하는 시대정신은 ‘노예적 삶에 대한 거부’라고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좀비물이 사랑받지 못했던 까닭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여러 면에서 한국은 좀비를 부리는 존재에 대해 경외감을 품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믿어왔다. 자기 동포를 도륙한 일본제국주의를 아직도 칭송하거나, 이웃을 수백만이나 살해한 독재자를 국부로 숭상하고 있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런 사회는 농민들을 좀비로 양산해서 하루 16시간 씩 노동하게 했던 만주군 장교의 동상을 세우는 사회고,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반역범죄자에게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하며 찬양했던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아직도 권위를 가지는 사회다. 

하지만, 한국도 언제부터인가 좀비가 나오는 공포콘텐츠들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되었다. 그 시점은 대중문화의 빅뱅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정착이 있었던 90년대를 거쳐서 뉴밀레니엄에  이르러서야 도래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좀비 PC란 말을 대중들도 인식하게 만든 DDos 공격 스킬 역시 큰 역할을 했다. 감염된 자신의 PC를 데이터와 함께 밀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좀비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꼈을 테니까.

어쨌든 인권이 중시되고 정체성과 취향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해 지면서, 특히 내 표 하나로 최고 권력자가 바뀌는 경험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좀비처럼 사는 삶을 거부하게 되었고, 좀비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당연히 좀비가 공포스럽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중요하게 고민하는 것은 좀비를 근원적으로 퇴출시킬 방법이다. 실수나 불운 때문에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고 해도 나을 수만 있다면, 더 나아가 아예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면 더 이상 좀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비를 다룬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처음엔 종말론의 강력한 사회적 예방 효과에 주목해서 치료책에 관심이 없었고, 조금 지나면서는 아예 숙명론에 빠져서 전 인류의 좀비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듯 좀비 월드를 그려내면서 고민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만들어지는 콘텐츠들에서는 적극적으로 치료책을 고민한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선  주인공을 좀비 바이러스를 극복해서 영웅이 되는 존재로 만들어 구세주 신화를 얹기도 했고 일부 게임에서는 바이러스를 추출해서 치료제를 만드는 과학 맹신 신화를 얹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좀비 치료제는 ‘웜 바디스’라는 영화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좀비R은 어느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난 어떤 존재이고, 어디에 있고, 뭘 하고 있는가. 좀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가히 혁명이다. 좀비가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좀비 소굴에서 뭔가를 찾으려 들어온 운명의 짝 ‘줄리’를 만난다. 그리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뇌가 움직이고 심장이 뛰면서 몸이 따뜻해지고 좀비 워킹이 달라진다. 스스로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해 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무릎을 치게 되는 것은 그동안 수많은 창작자들은 좀비를 그려내며 놓쳤던 사실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좀비에게도 뇌가 있고 심장이 있었다. 다만,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어, 반사신경만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기에 폭력적 식욕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멈춘 심장 때문에 사지가 굳고 썩어가고 있어 비틀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좀비들이 ‘브레인’을 외치며 산 사람들을 공격했던 것도,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뇌와 심장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경이롭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좀비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명쾌한 해답을 던져 놓은 것이다.

대한민국엔 여전히 좀비 바이러스의 숙주들이 사방을 물어뜯으며 바이러스를 전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전보다 그들의 도발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생각하고 질문하는 사람들과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함으로 가슴이 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눈물흘리며 함께 노란 리본을 접었던 그 많은 부모들, 혹한에도 바이러스를 쏟아내는 수많은 확성기들에 감염되지 않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그 많은 시민들, 포항 지진으로 시험이 미뤄지면서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용돈을 털어 포항의 친구들을 격려했던 그 많은 수험생들, 그들의 ‘웜 바디스’를 감히 좀비 마약이나 바이러스가 어떻게 침탈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백신을 기다리기보다 오늘 이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웃들과 사랑을 나눌 일이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좀비 치유제일 테니까.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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