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으로 우연히 동행해 김구 선생 귀국 직전 모습 기록
귀국 앞둔 김구, “나 같은 사람을 무엇에 쓰려고 기다린단 말이오” 
김구, 미군정의 1차 귀국 시도 실패, 한 달 뒤 2차 시도 때 귀국

 

[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백범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주석(이하 김구)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이범석은 <철기 이범석 자전>에서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주석이 된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동녕 선생이 임시정부 주석을 맡고 있을 때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하루는 “윤봉길 의사의 배후 인물인 김구 선생은 뭘 하는 사람이오” 하고 문의가 왔다. “아, 그야 우리 임시정부 주석이지요” 해버렸다.

이동녕 선생은 부랴부랴 임정원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석상에서 백범 선생에게 간청했다. “국민당 정부에 당신을 우리 임정의 주석이라고 해놓았소. 그러니 곧 주석이 되어줘야 하겠소.”

백범 선생은 누차 사양했으나 이동녕 선생은 주석 자리를 넘겨버리고 일어섰다. 1939년의 일이었다. 이런 연유로 김구 주석이 후에 국민당 정부와 협의할 때 정식으로 주석의 자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지위나 체면 따위는 초개처럼 내던지는 지도자의 금도를 나는 이 두 분을 통하여 여러 차례 체험하였다.

백범 선생으로서도 평소에 이동녕 선생을 매우 존경하여 매사를 그분의 지도에 따르며 스승으로 모시는 형편이었다.> 이동녕 선생의 배포와 기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어쨌든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일부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것은 해방된 지 3개월여가 지난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였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등 임정 요인들과 장준하, 윤경빈, 선우진 등 수행원을 합쳐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건만 임시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의 입국이었다. 귀국 사실 자체가 비밀에 부쳐졌기에 환영 인파도 없었다. 미군정청은 군용차 5대에 일행을 태워 시내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6시 미군정청은 하지 사령관 명의로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오랫동안 해외에 망명 중이던 김구 씨 일행 15명이 오늘 하오 서울에 도착했다. 망명 애국자인 김구 씨는 일개 개인의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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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귀국 막후에는 한 한국인이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 하에서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 씨(이하 김형민)다. 190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해방 정국의 격동기에 ‘미국’과의 인연에 힘입어 역사의 현장에 있게 됐다. 그가 있었기에 귀국을 앞둔 김구의 모습이 역사 기록 속에 남았다. 

김형민은 회고록에서 김구의 귀국 과정에 미군과 동행하게 됐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루는 308비행대대 부관인 딘 대령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중국 상해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출국하니 동행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같이 가겠다고 승낙했다. 딘 대령은 자신이 한국말을 모르니 통역을 해주기 위한 동반이라고 했다. 딘 대령은 비행사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섭을 벌이러 가는 사람은 주한 미 제24군 총지휘관인 하지 중장의 비서관인 로건 대령이었다. 그는 내가 졸업한 미시건대학 선배였다. 여권도 필요 없고 자신들이 타고 가는 군용기에 동승만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미군 전투기 B16을 타고 김포를 떠나 상해로 갔다. 로건 대령은 내게 주의를 주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귀국케 하는 것은 비밀 중의 비밀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상해에서 제일 좋은 브로드웨이맨션호텔에 묵었다. 나는 중경에서 상해로 온 조소앙 선생과 조소앙의 친아우인 조시원을 만났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선발대로 상해로 온 것이고 김구 선생이나 다른 분들은 아직 중경에 남아 있었다.

사흘간 상해에 머물면서 약 한 달 후에 다시 올 테니 그때가지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로 모여 있으라고 전한 뒤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11월에 다시 상해로 갔다. 우리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짐을 싣기 위해 수송기 C32를 가지고 갔다. 우리가 탄 전투기는 속력이 빨라서 먼저 상해에 착륙했다.

나는 첫 번째 상해에 왔을 때 알게 된 구익균 씨를 만나 페티카를 타고 서쪽으로 약 1시간을 달려 상해시장의 별장으로 갔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김구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서실로 들어가서 조완구 비서와 엄항섭 씨를 만났다.

엄씨의 안내로 김구 선생이 계신 방으로 나 혼자 들어갔다. 방은 매우 컸고 무슨 집회실로 쓰던 방 같았으며, 한쪽은 강단으로 되어 있었다. 이 강단 위에 마치 임금님의 용상 같은 큰 의자에 김구 선생이 앉아 계셨다. 방안은 좀 어두컴컴했다.

나는 김구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고국에서는 선생님의 귀국을 몹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김구 선생은 웃으면서 “나 같은 사람을 무엇에 쓰려고 기다린단 말이오?” 하며 퍽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고국을 떠나 있은 지가 수십 성상이라 고국의 형편을 잘 알지 못하니 내가 이제 고국에 돌아간들 무엇을 하겠소” 하셨다.

“그래도 고국에 있는 동포들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했더니 “구태여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내가 돌아가서 신주(神主) 노릇이나 할까요?” 하고 끝까지 겸손한 말씀만 하셨다. 이때 하지 중장의 비서인 로건 대령이 들어와 나는 구익균 씨와 같이 돌아왔다.

'김형민(맨 왼쪽) 여운형(중앙) 김규식(여운형 왼쪽) 등의 모습이 보인다(출처: 김형민 회고록)

서울로 비행해 오는 도중에 우리는 속력이 느린 수송기를 기다렸다가 앞세우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오다가 다시 뒤처지면 돌아서기를 몇 번 하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에야 가까스로 김포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아무도 영접을 나온 이가 없었다.

김구 주석은 미군정에서 내보낸 차로 충정로의 최창학 씨 저택으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나머지 분들은 충무로에 있던 일본인 호텔인 본정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늦게 서야 각 신문에서 호외를 발행해 김구 주석과 그 각료들이 서울에 온 소식을 보도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한 것은 10월 16일이었다. 김구가 귀국한 11월23일보다 한 달 정도 빨랐다. 만약 해방 직후 김구가 중경에서 상해로 와 있었다면 미군정이 1차로 김구를 모셔오기 위해 상해로 갔을 때 귀국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 시기는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한 달의 차이는 해방 정국에서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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