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冬將軍)의 기세가 매섭다. 수은주 10도C 이하로 뚝 떨어진 한파에 맥을 못출 정도다. 그러고보니 기자의 유년기 겨울추위는 뼛속 깊이 사무치는 강추위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당 한 켠에 마중물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가 딸린 세면장으로 가 고양이세수를 해야했다.
서슬퍼렇던 아버지의 기운에 눌려 찍 소리도 못하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에 차가운 물을 섞어 세수를 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금새 머리카락엔 고드름이 얼었다. 세수를 마치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다 쇠 문고리를 잡는 순가 ‘쩍’하고 달라붙던 섬뜩(?)한 촉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혹한의 추위 탓일까! 문득 그 시절 아련한 추억과 함께 음식 몇 가지가 떠오른다. 때마침 엊그제 고향 전라도에서 김장김치 한 박스가 배달 돼 왔다. 김치를 개봉하자마자 남도 특유의 김장재료인 젓갈냄새가 코 끝을 휘감았다.
겨울 초입 이맘때쯤 멸치, 새우젓 등을 끓이고 찹쌀풀을 쑤어내 쪽파 당근 갓 앙파 미나리 청각 등 각종 부재료를 충분히 넣고 버무려내는 어머님표 김장김치. 이날은 온 집안이 젓갈냄새로 풀풀대 코를 마비시킨다. 김장하는 날엔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품앗이로 일을 거든다.
남정네들은 막 버무린 김치가닥을 맛 보겠다고 생전 안하던 정제(부엌)를 기웃거린다. 그러다 김치를 얹은 막 삶은 돼지고기수육 몇 점에 술 한잔 하는 호사를 누린다. 물론 그 달콤함 뒤에 땅을 파 김장독을 묻는 수고로움은 자연스레 남자들의 몫이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둔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냉장고가 귀했고 김치냉장고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 뒤 뜰 장독대 옆 땅을 깊이 파 1년 내 먹을 김치며, 동치미를 항아리에 담아 묻고 짚다발로 덮는 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최고의 저장법이었다. 어머니는 김장을 다 끝내놓고서야 1년 농사 다 마쳤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장김치와 함께 떠오르는 또 하나 추억의 음식은 시래기된장국이다. 시골에서 전형적인 겨울식량중 하나인 시래기는 늦가을 수확한 무청무 줄기와 배추를 말리거나 삶아 저장해 먹는 식재료다. 빈궁기, 변변찮은 반찬이 없던 시절 밥상에 생선이라도 한 토막 올라오면 쾌재를 부를 때다. 어머니는 큼직한 육수용 멸치를 넣고 차가운 물에 불려 부들부들해진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맛깔스런 국을 끓여냈다.
일부 50을 넘긴 중년층에선 그때 매일 먹다시피 한 이 시래기된장국을 질색하기도 한다. 왜 아니겠는가! 좋은 음식도 매일 먹다보면 질리기 마련이니. 그러나 기자에게 이 시래기된장국은 지금도 손가락으로 꼽는 추억의 음식이다. 추운겨울 아침 뜨끄뜨끈한 구수한 시래기된장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 말아먹으면 하루가 거뜬했다. 현대인이 요즘 의무적으로 먹는 건강보조제 비타민C의 천연약에 다름 없었다. 그 시절 헛간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시래기와 오버랩 되는 Soul Food(영혼의 음식) 시래기된장국이 부쩍 그리운 요즘이다.
김치야 지금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건강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의 대표 고유음식이다. 여기에 시래기된장국까지 곁들이면 전 세계 어느 식탁에 내놔도 손색없는 건강밥상으로 추천할만 하다.
올해도 고맙게도 어김없이 고향 어머님이 보내주신 정성 가득한 김장김치를 받아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연말엔 고향을 찾아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된장시래기국 한 그릇과 마주할 것이다. 소박한 밥상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내 유년의 아련한 추억을 대면하면 추위도 저만치 달아날 것이다.
내 안의 건강 DNA를 소환해줄 영혼의 음식 시래기된장국과 김장김치의 멋진 콜라보레이션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완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