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장관이 ‘서울’ 이름 정했다.

1946년 8월15일부터 ‘서울’로 불려.

 

[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인구 1천20만명(2016년 12월31일 기준)에 1년 예산 29조8천11억원(2017년 예산)을 쓰는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다. 그러나 서울시민 가운데서도 이 도시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서울시’로 불려왔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울은 조선시대에는 한성,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이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서울시장은 조선시대에는 한성판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윤이었다. 경당시 경기도 안에는 ‘부’로 불리는 도시가 세 개 있었다. 경성부, 인천부, 개성부였다.

광복 후 미군정 하에서 첫 번째 경성부윤은 김창영이었다. 평안북도 강계(江界) 출신인 그는 1911년 평양고보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계군 공북면 면장, 강원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보, 경찰부 위생과장, 전북 금산군수, 만주국 치안부 사무관, 전라남도 참여관겸 산업부장 등을 지낸 친일파 인사였다.

두 번째 경성부윤은 이범승이었다. 1945년 10월25일부터 1946년 5월9일까지 재직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황해도청 내무부 산업과장 등을 지냈고,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양주경찰서장을 지냈다. 이범승은 경성보다는 한성이라는 이름이 좋다면서 스스로를 한성시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시립도서관을 설치하는 조례 제정을 추진, 지시한 일이다. 특히 그는 자신이 인수하여 운영하던 종로의 경성도서관을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에서, 경성부립종로도서관(현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 종로도서관 마당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이유이다.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은 김형민씨다. 그는 개성 송도중학교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고 있던 중 서울시장이 됐다. 지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웨슬리안 대학에서 교육학 학사, 미시건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한 그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이 중국으로 김구 선생을 모시러 갈 때 비행기에 동승했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의 임무는 통역이었다.

 

미 군정장관, ‘서울헌장’에서 수도 이름을 ‘서울’로

서울시 홈페이지에는 ‘서울’ 명칭과 관련해 이렇게 나와 있다.

‘서울이라는 명칭은 신라 초기 도읍지의 지명이자 국명이던 서벌 또는 서나벌·서야벌에서부터 시작되어 변화했다. 8·15 광복 이후 경성부의 칭호를 전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서울 또는 한성으로 부르게 되었고, 1946년 8월15일 정식 명칭이 되었다.’

이처럼 ‘서울’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46년 8월15일이다. 전날인 8월14일 미 군정장관인 A.L.러쉬 소장이 "(서울시)헌장에 의해 서울시가 경기도 관할에서 이탈해 하나의 도 수준으로 승격됐다"고 발표한 내용이 이날 언론에 보도되면서 비로소 일반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미 군정청은 '서울시 헌장' 제1조에서 비로소 우리나라 수도의 이름을 '서울(SEOUL)'로 명확히 했다. 도읍을 뜻했던 서울을 아예 고유명사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특별시'란 이름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보름 가량 지나서부터다. 미 군정청은 1946년 9월18일 `서울특별시의 설치'라는 군정법률 제106호를 공포했으며, 10일 후인 그해 9월28일 법이 발효되면서 서울은 비로소 새 공식 명칭을 얻게 됐다. ‘서울’이라는 명칭이 공식화한 과정은 1910년 한성부가 일제에 의해 경성부로 바뀐 과정과 닮은꼴이다. 한성부는 1910년 10월1일 총독부령 7호에 의해 경성부로 바뀌었다.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왼쪽). 사진출처=김형민 회고록.

석유상 하던 김형민 39세 나이에 초대 서울시장 되다.

김형민은 정말 우연하게 서울시장이 됐다. 삼일사라는 석유상을 운영하며 나름 풍족한 삶을 살던 김씨는 어느 날 서울시청의 미국인 고문관이었던 윌슨 중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경성부윤실로 갔더니 그가 김씨의 학력을 물어보더니 “경성부윤으로 있던 이범승 씨가 사직했는데 후임이 되어 달라”고 한 것이다.

김씨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석유상을 잘하고 있을뿐더러 관청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지방 행정에 전혀 경험이 없는 연소자(당시 김씨는 38세였다)라고 했다. 군정장관인 러쉬 소장은 김씨에게 “현재는 서울시가 경기도에 예속되어 있지만 곧 독립시로 승격해 중앙 정부에 예속시키겠다”고 말했다. 러치 장관은 몇 차례나 ”미국인인 자신들도 한국에 독립된 정권을 세우려고 하는데 한국 사람인 당신이 잠깐 동안이나마 그 일에 협조를 할 수 없느냐“는 식으로 김씨를 압박했다.

결국 김씨는 러쉬 소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서울시장에 취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연소 서울시장이었다.

김형민, “수도 이름을 서울로 하면 곧 고유명사가 되는 것”

당시 수도 명칭을 ‘서울’로 하는 것에 대해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한성은 한자로 쓸 수 있지만 서울은 한자로 쓸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운 주된 이유였다. 김씨는 자서전 <김형민 회고록>에서 ‘서울’이라는 이름과 관련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우리나라 수도 이름을 우리 한글로 표시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서울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 명사이지 고유명사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도 있었다. 그러나 수도 이름을 서울로 하면 이것이 곧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한자로 표기가 안 된다는 구실로 반대를 하던 그 서울이라는 이름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해 내려오면서 시민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김형민은 일제강점기의 거리 명칭을 충무로 원효로 등 우리가 쓰고 있는 이름으로 바꾼 주인공이다. 일본인들은 거리 이름에 ‘정(町)’자를 썼다. 일본말로 ‘마찌’라고 불렀다. 이것을 동으로 바꾸었고 조선 시대에 쓰던 마을의 동리 이름을 찾는데도 힘썼다. 황금정을 을지문덕 장군에서 착안해 을지로로, 본정을 충무공 이순신에서 착안해 충무로로, 용산 원정을 원효대사에서 착안해 원효로로, 서대문 죽첨정을 충정공 민영환에서 착안해 충정로로 고쳤다. 광화문통은 세종대왕에게 착안해 세종로로, 소화통은 이황 선생에게 착안해 퇴계로로 바꾸었다. 단, 종로는 옛날부터 쓰던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김형민은 종로구, 동대문구 할 때의 ‘구’라는 명칭도 고치고 싶어 했다. ‘구’는 일본인들이 붙인 일본식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구가 아니고 부였다. 그러나 당시 지방 행정 책임자에게는 구의 이름을 고칠 권한이 없었다. 내무부장관이 그 권한을 갖고 있었다. 김형민은 구 명칭을 고치기 위해 내무부에 상신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오늘날까지 ‘구‘는 살아남았다.

1948년 12월 14일 군정장관을 지낸 딘 소장의 초청으로 강화도로 오리 사냥을 갔다가 돌아온 일요일 오후 김형민은 후임 서울시장에 윤보선 씨가 임명되었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보았다. 2년 3개월간(1946.9.28 ~ 1948.12.14.) 서울시장을 지낸 그는 이후 삼일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1998년 5월 2일 서울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해 고향인 전북 익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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