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양지열 편집 자문위원/변호사] 27살로 삶을 마감한 그룹 샤이니 종현의 영결식이 지난 21일 열렸다. 2008년 데뷔한 샤이니는 한류 스타이다. 중국, 일본,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도 팬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 K팝을 다루는 잡지가 만들어졌을 때 표지모델을 장식한 것도 샤이니였다.

그런 샤이니의 메인 보컬이었던 종현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언론은 아이돌 연예인의 심리에 대해 다루었다. 그의 유서를 공개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 베르테르는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베르테르 효과’는 유명인처럼 평소 선망하던 사람이 자살했을 때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며 불행한 선택을 뒤따르려는 현상이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대문호라는 괴테에 대한 수식어와 문화상품에 대한 시대적 차이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된다.

이 책은 피가 끓는 20대 청년이었던 괴테가 쓴 것이다. 유럽 역시 절대 왕정으로부터 벗어 나려는 시민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던 뜨거운 시기였다. 그런 배경 위에 귀족과 평민이라는, 유부녀와 청년이라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그리고 권총자살이라는 금기를 다뤘던 것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유튜브도 없던 시대였다. 괴테의 소설은 블록버스터 영화였고, 차트를 장악한 음원이었다. 숨막힐 듯한 봉건시대를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의 저항 의식에 불을 질렀다. 베르테르는 그들에게 슈퍼 스타였다. 유럽 젊은이들은 마치 베르테르가 실존인물이라도 되는 양 소설에 나오는 푸른 코트와 노란 조끼를 따라 입었다. 그 중 지나친 일부가 극단적 선택 마저 따라했던 것이다.

종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땠을까. “무슨 말을 더 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라고 썼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는 멤버들 중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행보로 눈에 띄었다. 예능 프로로 얼굴을 알리거나,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 장면을 찍히지도 않았다. 작사, 작곡에 능한 실력파 싱어송 라이터로 인정 받았다. 솔로로 데뷔했고 불과 얼마전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언론은 심리 분석에 들어갔다. 마음의 병을 돌 볼 사이도 없이 성공에만 매달려야 하는 아이돌 육성 시스템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어찌 알 것인가. 이제 고인의 마음을 들을 방법이 없는데. 어찌됐든 종현이 앓았던 마음의 병은 베르테르와는 달라 보인다.

# 다른 종현은 없을까

종현의 유서를 접한 젊은 연예인들은 어땠을까.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 무서웠다는 고백 기사가 눈에 띈다. 그런 현상이 비단 연예인들만의 이야기 일까? “잘했다, 고생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을 만큼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다. 하기야 아이돌만 하루 17시간의 스케쥴을 소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에 내몰린 아이들은 학원과 학원을 오가며 패스트푸드점에서, 엄마의 차 안에서 끼니를 때운다. 대학 합격의 기쁨은 잠시 이내 ‘취준생’으로 신분이 바뀐다. 쪽방에서 자며 몇 년이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비관하는 청춘이 한 둘이 아니다.

그나마도 부러워하는 눈빛들 역시 가득하다. 취업을 위해 특성화고에 들어갔다 어른들의 이기심에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던가. 콜 센터에서 콜 수를 채우지 못했다고 현장실습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컨베이터 벨트가 죽음으로 등을 떠밀었다. 백팩에 든 컵라면조차 먹지 못한 채 전동차에 끼어 숨을 거두기도 했다. 다들 너무나 힘들다.

그렇게 보면 종현의 죽음이 주는 파장은 베르테르의 그것보다 더 걱정스럽다. 2015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 40%의 장래 희망은 문화, 예술, 스포츠 관련직이다. 종현은 그런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결식엔 수많은 팬들이 모여 그가 남긴 노래를 불렀고, 해외 곳곳의 한국 대사관엔 팬들의 헌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사랑받았던 연예인조차 힘겨움과 외루움을 떨치지 못했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 사회가 유죄 아닐까

한국사회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죽음은 반드시 막아야 할 결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다르다면 해결책도 달라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은 베르테르처럼 끓는 피를 주체못해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죽음으로 떠밀리고 있다. 가장 화려한 자리에 서 있던 연예인도, 홀로 공장을 지켰던 제주 실습생도.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다. 자살은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물론 세상을 떠난 이의 잘못을 묻는 것은 아니다. 곁에서 부추겼거나 도와준 사람을 처벌한다.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스스로의 선택이었을 지언정 주변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다. 종현의, 다른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자살 교사죄 혹은 방조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막아야 한다. 너무 아프다. 고인의,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평안히들 쉬시길.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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