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크리스마스인데도 캐럴이 사라졌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12월이 채 되기도 전에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트리에 반짝이 전구들과 장식들이 내걸리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성탄 연휴가 시작된 23일에도 거리에서 캐럴송을 듣기 힘들 정도였다. 사라진 캐럴에 겨울비와 미세먼지까지 더해지니 올해 크리스마스는 블루 크리스마스를 넘어 그레이 크리스마스가 되었다는 푸념마저 나온다.

도대체 캐럴을 이토록 처참히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가장 잘 알려진 괴담으로는 ‘저작권법’이 범인이란 주장이다. 한 백화점이 지난 2010년부터 2년간 디지털 음원을 전송받아 스트리밍 방식으로 매장에 틀었다가 ‘한국음반산업협회’ 등으로부터 공연보상금을 내라는 소송을 당했다고 한다. 소송 끝에 그 백화점은 협회에 2억3500만원을 배상했다니 가히 ‘저작권료 폭탄’이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저작권료는 영업장 면적에 따라 다르다. 저작권료 징수 규정 제12조에 따르면, 면적이 3000㎡(약 907평) 이상인 백화점·대형마트 등이 아니라면 아예 징수 대상이 아니다. 즉, 3000㎡ 미만의 커피숍, 호프집, 소형 상점 등은 캐럴을 틀어도 저작권료가 면제되는 것이다.

물론 이르면 내년 하반기부터 개정된 저작권법이 적용되어 징수 대상이 늘어나긴 한다. 징수 대상에서 제외됐던 커피숍, 호프집 등 3000㎡ 미만의 매장도 저작권료를 지불해야만 하지만 그 액수가 미미하다. 15평에서 30평은 월 4,000원, 60평까지는 7,200원, 300평이 넘는 가게도 월 2만 원을 부과한다. 게다가 전통시장과 50㎡(15평) 미만의 소규모 매장은 계속 저작권료 없이 캐럴을 틀 수 있다. 그러니 손님들이 좋아하고 캐럴 때문에 더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런 투자를 안 할 곳이 없다.

어떤 매체에선 ‘소음규제’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주거지역에 위치한 사업장 등은 주간에는 50㏈, 야간에는 40㏈ 이하를 유지해야 하고, 확성기·스피커를 밖에 설치했을 때는 주간 65㏈, 야간 60㏈ 이하의 기준을 지켜야 하는데, 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것이다. 조용한 사무실의 소음이 40dB,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소리가 보통 60dB이라 하니, 스피커를 밖에 설치해도 이 규정대로라면 캐럴을 크게 틀 수 없어서 안 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홍대 앞이나 강남 역에 가보면 바로 힘을 잃는다. 규정을 제대로 안 지키는 상점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심지어 스피커를 옆에 차고 호객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데, 소음 규제 때문에 캐럴이 죽다니, 현실을 모르는 주장이라 할 수밖에 없다.

캐럴을 죽인 범인이 ‘이명박근혜 정권’이란 주장도 있다

지난 2012년 여름부터 캠페인으로 시작되어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한 ‘문닫고 냉난방하기’가 음악을 거리로 흘러나오지 못하게 했으니, 결정적 범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거리에서 음악 소리 전체를 줄어들게 한 원인은 될 수 있어도 캐럴만 들을 수 없게 한 원인이라고는 볼 순 없다. 양극화 심화 정책과 국정 농단을 통해 ‘나라를 죽인 범인’은 될 수 있어도, 캐럴을 죽인 범인이 ‘이명박근혜 정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상당히 강력한 혐의자로 ‘홀리데이 블루스’를 꼽은 매체도 있었다

이는 연말이 되면 우울해 지는 증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캐럴이 이런 증상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이 증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캐럴을 죽였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겨울 시즌송이란 대체용품도 질이 좋고 다양해서 캐럴을 죽여도 부담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연말만 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한 해 동안 자신이 성취한 것이 변변찮고 미래가 암울하다고 느껴 하릴없이 나이를 먹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취업 절벽 앞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며 모든 것을 포기하길 강요당하는 20대는 새해가 다가오는 것이 공포스러울 뿐이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에도 캐럴에 나오는 낭만적이고 행복한 경험들을 할 수 없기에, 캐럴의 가사가 저주스럽다. 더욱이 ‘솔크(솔로들의 크리스마스)’ 멤버라면 린다블레어란 임상심리학자의 “캐럴 특유의 반복되는 멜로디와 박자, 크리스마스 때 하는 일들을 나열하는 가사가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혐의자는 의외의 단서에서 찾을 수 있다

캐럴은 원래 야외 축제 등에서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부르는 음악을 일컫는 말로, 어원인 프랑스어 carole는 중세시절 빙글빙글 도는 춤에 어울리는 노래였다. 우리가 흔히 포크댄스라 부르며 배웠던 춤들에 어울리는 그런 음악이 12세기에 이르러서 크게 사랑을 받다가 종교와 만나 기적극 성사극에 쓰이면서 더 대중화되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리는 노래가 된 것이다.

때문에 이 노래는 반드시 친밀한 공동체를 전제로 한 문화다.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면서 듣는 노래가 캐럴이고, 자식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즐기는 노래가 캐럴이고, 손자들의 행복한 새해를 기원하며 부르는 노래가 캐럴이고, 교회나 학교 친구들과 썸을 타면서 크리스마스카드에 마음을 적을 때 나오는 콧노래가 캐럴인 것이다. 그 모든 공동체가 깨지거나 위태로운 시대에 캐럴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욱이 저 혼자 잘 살겠다고 교회공동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세습을 강행하고, 공동체의 의무인 세금납부도 거부하는 목사들이 있는 사회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가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모든 크리스마스 문화들이 다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변형된 할로윈 데이의 문화는 개인이 가면 뒤에 숨는 문화지만, 크리스마스는 태생이 그럴 수 없다. 인간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신이 인간 공동체의 가장 약한 존재로 태어난 것을 기억하는 축제인데 어떻게 개인적일 수 있을까? 아기와 부모, 그리고 그를 축하하는 공동체가 필수인 것을.

‘솔크’의 비극적 비주얼을 이미 89년에 절실히 보여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샐리 혼자서 그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끌고 가는 웃픈 장면을 기억하는가? 아무리 성공한 삶이라고 해도 혼자서 트리를 장식하고 혼자서 캐럴을 듣는 것은 외로움을 폭발시키기 위한 미친 짓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에선 모든 크리스마스 용품의 매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1인 가구 30% 시대에 출산율도 바닥이니, 1코노미에 어울리는 장식 소품 정도만 반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마트의 통계를 보면 12월 크리스마스용품 판매량은 2016년에 전년 동월 대비 19%, 올해 10% 감소했고 그나마 판매되는 크리스마스용품도 간단한 제품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강력한 증거가 아닌가?

연말은 가을걷이 이후 풍성한 나눔을 실천하면서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나눌 게 없으면, 좀 더 정확히 말해 나눌 마음이 없으면, 겨울은 혹독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미래는 위태로워진다. 게다가 겨울을 버틸 종교적 신심까지도 타락해 버렸다면 아예 온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캐럴 살인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가 죽어야만 캐럴이 살고, 공동체가 살고,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이할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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