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었다. 2015년 들어서면서 조금씩 한일관계가 나아지고 있었다지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느낌이었고, 갑작스레 합의안이 발표되었다. 

이런 저런 내용이 있었지만, 핵심은 그것이었다. ▲아베 총리가 현 총리로서 사죄의 마음을 가진다, ▲합의 내용은 불가역적이다, ▲그리고 10억 엔을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재단에 출연한다. 

이후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이전 문제 등이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이 급조한 듯 한 합의 사항 중 국민에게 알리지 않은 다른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이 합의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들과 이제는 한일관계도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이들을 가르는 기준은 대체로 한 가지였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보수냐 아니냐. 특히 일본에 가장 적대심을 표출했었던 노년층이 급작스럽게 미래를 향한 한일관계 운운하고 나서는 모습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2013년 취임하고 처음으로 맞았던 3.1절 기념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피해자와 가해자는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2014년 3.1절 기념사에서는 직접적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언급했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한일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한일 관계는 경색에 경색을 거쳐 파국까지 언급될 정도로 나빠졌다가, 2015년 한일외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미국의 압박이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이 되고 이슈화가 되면서 매우 분노했었던 기억이 난다.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이다. 전쟁 중 여성 인권을 유린한 무자비한 범죄인 것이다. 

단순히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문제로 다루어서는 안 될 죄악의 무게가 담겨져 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 뿐 아니라 중국, 홍콩,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을 위시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의 여성들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법을 전공하는 학자들이나 전쟁 중 여성인권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문제로 국한시키는 것에 반대해왔다. 이는 마땅히 국제 이슈로 취급 받아야 하는 인류에 대한 저열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있다. 저명한 유태인 여성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미국의 ‘뉴요커’라는 잡지로부터 요청받아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쓴 르포를 모은 책이다. 

부제인 ‘악의 평범성’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아이히만이라는 희대의 나치 전범이 평범하기 그지없고 가족과 이웃에게는 다정다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극악무도한 나치가 된 것은 양심에 근거한 ‘사유’없는 명령 수행 때문이었다. 

우리가 요즘 많이 듣는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의 오리지널 버전이다. 아렌트는 그를 통해서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지를 주장한다. 이 책이 나오고 아렌트는 나치 전범을 평범하다고 묘사했다는 이유로 시오니스트를 비롯한 유태인 공동체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살해 협박은 물론이고…
    
사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비판적 시각을 구술한다.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신분을 숨긴 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불법으로 납치해서 이스라엘로 데리고 온 후 법정에 세운 것이었다. 

당연히 아르헨티나는 영토 침해 및 주권법 위반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수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보낸 악마 같은 인물이니 그 정도의 국제법 위반은 봐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많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에 반대 의견을 피력한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재판이 있었다. 인류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권을 침해한 이들에 대한 유례없는 재판이었다.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권’이라는 개념은 사실 그 역사가 짧다. 

전범재판은 승자가 패자에 가하는 형벌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를 단죄한다는 획기적인 노력이었다. 물론, 과정과 결과에 대한 잡음은 여전했다. 관할권은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형을 집행해야 하는지, 승전국 판사들이 주재하는 재판의 공정성 등. 그러나 시도만으로도 ‘인권’이라는 개념을 개진시켰고, 이후 국제형사재판소가 상설화되는 뿌리가 되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라는 ‘인류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을 이스라엘의 재판정에 세우는 것에 매우 불편해했다. 인류 모두가 고민해야 할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이스라엘 민족의 정당한 복수극정도로 격하시켰다고 본 것이다. 

유럽 역사 안에서 뿌리 깊게 내려오는 반유대주의와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을 고민했던 아렌트에게,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아이히만 재판과 사형 판결은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정치적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이로 인해 인류가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는 기회가 손상되었다고 보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위안부 문제 접근은 이와 다를 바 없다. 

인권, 전쟁 범죄, 여성에 대한 총체적인 몰이해와, 배운 거라곤 정치적 선동밖에 없는 이에게서 나온 수준 낮은 활극이었다. 그나마도 손봐주겠다고 칼 휘두르고 나섰다가 되레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온 셈이다. 

외교참사라는 말조차 아깝다.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했던가.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혼이 비정상인 지도자를 뽑은 대가로 치러야 하는 짐이 너무 버겁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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