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한국 영화의 뒷심이 무섭다. 올 한해 한국영화에 대한 평가를 사실상 마친 매체들이 기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막판 흥행 열풍이 불어 닥쳤는데, 예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박스오피스 기록에 의하면 지난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영화 빅3에 몰린 관객이 650만을 넘었다. 영화 ‘국제시장’이나 ‘변호인’이 연말 극장가를 달구던 2015년, 2013년과 비교해 봐도 이토록 뜨거운 반응은 이례적이다.  

흥행 열풍의 중심에는 세 편의 문제작이 있다. 

먼저 14일 영화 ‘강철비’가 개봉하면서 막바지 흥행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설정과 함께 펼쳐지는 전쟁 위기를 진지한 문제의식과 설득력 있는 가정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미국, 일본, 중국의 이해타산 속에 남북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다양하게 모색하며 분단의 아픔을 절감하게 했고, 2017년의 마지막 날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일 개봉한 ‘신과 함께: 죄와 벌’은 강철비와 쌍끌이 흥행 구도를 만들어 내며 흥행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다. ‘신과 함께 : 죄와 벌’은 아이를 살리려다 대신 죽게 된 소방관이 환상의 저승차사 변호팀과 7개 지옥을 거치며 재판을 받고 환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소 뻔한 스토리지만 한국 무속과 불교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쳐서 매력적인 콘텐츠를 탄생시켰다. 특히나 주목할 점은 한국 고유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히어로 판타지물로 구체화했다는 점인데, 살아서 죄 값을 물고 용서받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그 죄 값을 물고야 만다는 강력한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사법부 불신이 팽배해진 사회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이 영화는 애초에 2부작으로 제작되어 2편 ‘신과 함께: 인과 연’의 개봉시기를 조정하고 있는데, 800만을 돌파하며 한국형 시리즈 블록버스터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의미 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주목할 영화는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영화다.

한국 영화의 흥행 공식인 ‘쌍끌이’ 구도를 재편하며 막판 강자로 떠오른 영화 ‘1987’은 27일에서야 개봉했다. 87년의 6.10 민주화 대투쟁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기획 당시에는 6.10 민주화운동 30주년에 도저히 개봉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캐스팅이 시작될 2016년만 해도 영화에 참여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어떤 배우들이 함께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촛불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자 마치 누군가 써 둔 각본처럼  일이 풀리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17년 말에 마침내 개봉을 성사시켜, 촛불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를 입증해 낸 최초의 대중문화적 분석이 되었다. 

‘추격자’, ‘황해’의 황금 콤비, 김윤석, 하정우가 의기투합했고, ‘아가씨’로 깜짝 스타가 된 김태리도 합류했다. 문성근, 우현 등 6.10 당시의 피해자들은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 악역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유해진, 박희순, 이희준,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 고창석, 김의성 등이 자진해서 출연했다. 

강동원은 고 이한열 열사 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악플에 시달렸는데, 덕분에 외조부의 친일 행적까지 세상에 알려졌지만 겸허히 그에 대해 사과하고는 촬영에 임해서 결국 영화의 마지막을 빛내 주었다.

영화 1987는, 대중문화가 역사를 기록하는 또 다른 방식을 완성시켰다. 

영화 1987은 희망을 기록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시작했다. 그래서 애초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욕심내지 않고 시간을 압축시켰다. 혁명의 불꽃을 당긴 한 열사의 죽음에서, 거대한 들불로 옮겨 붙게 했던 다른 열사의 죽음까지의 6개월을 영화 속 시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것이었다. 이 6개월은 가장 암울했던 시간이 기적처럼 희망의 시간으로 바뀌는 6개월이었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6개월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영화는 반드시 어둠에서 시작해서 빛으로 끝나야 했다. 감독은 87년 1월 14일 밤을 첫 시간으로 선택하고 좁고 어두운 대공분실로 카메라를 밀어 넣은 뒤, 6월 10일 아침을 끝 시간으로 선택하고 찬란하고 뜨거웠던 그날 아침의 드넓은 시청 앞 광장을 버스 위에서 담아낸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절묘한 시공간의 배정이다. 

또 영화는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야 했다. 감독은 거짓이 판을 치는 고문 은폐 작업에서 영화를 시작해서 그 시도들이 하나씩, 무엇 때문에 무너지는지를 추적해 낸다. 그 작업을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방식은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영화의 거의 반 이상이 다큐멘터리 재연극처럼 진행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한 검사의 사체보존명령에서 시작된 ‘참’의 반격은, 기자들의 특종으로 이어지면서 부검을 관철해 내었고, 부검의가 양심의 펜으로 기록한 사인의 진실은 기자들이 권력의 보도지침을 무너뜨리는 힘이 되었다. 

다시 꼬리 자르기로 이어진 은폐의 집요함은 교도관과 수감 양심수의 진실 파헤치기로 이어져 고문경찰관의 억울함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었고, 남영동 대공분실과 독재 정권의 호헌 반역을 기어코 무너뜨리고야 만다. 그래서 이 영화는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소중한 교훈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또 영화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기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도 기록해야 했다. 그래서 감독은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아예 이야기를 저음부터 끝까지 주도하는 인물조차 없다. 특히 정치인은 아예 단 한 장면에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김대중, 김영삼 같은 거물들도 사진으로 스쳐갈 뿐, 그들의 영향력이나 역할은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를 만드는 자들이 모두 평범한 국민들이라는 진리를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작지만 큰 용기를 내어 침몰하는 진실을 건져 올렸다. 종교인들조차 남의 신앙에 저주를 퍼붓는 대신 각자의 절대자에게 순종하면서도 하나의 정의를 완성해 내었다. 그야말로 모든 노력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음을 영화는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영화는 적들의 심장부에 칼 하나를 꽂아 둔다. 

기자는 멱살을 잡은 치안감에게 묻는다. “그 돈 다 어디서 났습니까?” 돈, 그 엄청난 액수의, 그 모든 은폐를 가능케 하리라 믿게 했던 그 돈! 그 돈들은 안기부장 옆에서 차곡차곡 사과박스에 담겨져 어디론가 운반된 뒤, 최 환 검사의 입을 막기 위해 던져졌고, 황적준 부검의를 매수하기 위해서 제시되었으며, 고문 경찰들의 가족 생활비로, 교도소장의 회식 금일봉으로 당사자들이 원치 않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구 주머니에 꽂혔다. 

진실을 은폐하고 패악자들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그들을 공범을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쓰고 나면 공범이 되는 돈이란 무엇일까? 당연히 공금, 즉 세금이다. 그 세금이 어떻게 빼돌려졌는지는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의 범죄자들이 꼬박꼬박 나눠 먹었다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사례를 참조하면 짐작할 수 있다. 

영화 1987은 바로 이 지점에 칼을 꽂아둠으로 오늘의 숙제를 명확히 제시했다. 공금이 새어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반드시 밝히고 일원짜리 하나까지 다 회수해 내지 않는다면 적폐 청산은 미완성이 되고, 다시금 저들의 준동이 시작될 수 있음을 영화적 어법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여, 혁명을 노래하라!  

단순하지만 간결한 이 명제를 이전까지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카피 문구 정도로 치부하거나 지나간 시대의 낡은 예술창작개념으로 밀쳐버렸던 사람들에게 영화 ‘1987’의 성취는 의미심장하다. 

사실 ‘강철비’와 ‘신과 함께 : 죄와 벌’ 역시 한국 대중문화콘텐츠의 주요한 차별화 포인트를 잘 짚어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지만, 특히 ‘1987’은 살아 꿈틀대는 오늘의 역사를 정확한 관점에서 분석해 보는 ‘강철비’의 강점과, 공동체의 보편적 과제와 해결 방향을 극적 재미와 함께 제시하는 ‘신과 함께’의 강점을 두루 취하고 있다. 

또한 87년 한국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인류의 보편적 과제와 방향을 제시함으로 내수용이라는 한계마저 깨뜨렸다. 그렇게 ‘한국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한 창작의 젖줄이 확보된 것이다. 

분단과 독재, 레드콤플렉스, 군사 쿠테타 등의 장벽들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란 인류사적 사건들을 문화콘텐츠로서 제대로 기록하는 기회를 사실상 차단했다. 4.19나 5.18 역시 그 엄청난 서사적 가능성에 비해 충분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이 모든 사건들이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기 위해서는 물론 역사학자들의 헌신도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창작자들의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영화 ‘1987’의 2부, 3부가 거듭해서 제작되길 새해 벽두에 기원한다. 87년 말의 좌절과 88년 노동자대투쟁 성취를 담는 2부작이, 2002년 월드컵의 광장이 촛불로 이어지는 질적 변환과 2016년 겨울의 백만 촛불을 담는 3부작이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을 기대한다. 뮤지컬로 만들어지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 지길 기대한다. 

그렇게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또 다른 신화가 되어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처럼 타오르길 기대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책무는 혁명을 노래하는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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