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45년 8월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틀 뒤인 8월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12시간이 지난 8월8일 자정,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뒤인 8월10일 일본은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가 일본에게 항복을 권고한)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미국에 통고했다.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나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남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미국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고 통고한 순간부터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반명령 제1호’였다. 주무부서는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이었다.

이 가운데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는 전략정책단 정책과장인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이 맡았다. 미군 대령 두 사람의 손에 한반도의 운명이 맡겨졌던 것이다.

당시 소련군은 한반도 목전에 와 있던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인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반도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도 경계선 따라 분할하려다 위도 38선 그어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8월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쯤이었다. 국무성 쪽에서는 분할선을 가능한 한 북으로 올려 그을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소련이 한국 전역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군부측에서는 보다 조심성 있게 움직였다. 두 대령은 애초 서울 북부의 도 경계선을 따라 분할선을 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두 대령은 서울 북방으로 선이 통과하며 이것이 한국을 거의 똑같이 양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38선이었다. 두 사람은 지도를 보며 위도 38선을 분할선으로 잡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38선 분할’, 미국도 놀랐고 소련도 놀랐다
이 보고서는 링컨 소장을 거쳐 전쟁성장관, 국무장관 등을 경유해 최종적으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보고되었다. 이것이 바로 최종 확정되어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된 ‘일반명령 제1호’였다. 미국이 38도선 획정안을 소련 측에 전달한 것은 8월14일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나눈다는 안은 결과적으로 두 나라를 모두 놀라게 했다. 소련은 미국이 ‘후하게’ 위도를 남쪽으로 내려가게 경계선을 책정한 것에 놀랐다. 전쟁에 참전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바로 다음날인 8월15일 38도선 획정안을 수락한다는 답을 보내오자 놀랐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바로 인접해 있었던 데 반해 미군은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미군 내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만약 소련이 미국 측 건의를 거절할 경우 부산으로 미군을 급파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졌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 대신 피해자인 대한민국이 오히려 분단된 것이다. 이렇게 급작스런 과정을 통해 한반도가 분단되다 보니 미국은 한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미국이 1943년부터 2천 명에 달하는 육∙해군 장교들로 민정관을 양성했던 것과 비교된다.(이들은 훗날 일본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대부분이 한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우리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우리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 또 일어났던 것이다.

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미국은 1943년까지 한반도의 안보에 관하여 별다른 관심을 나타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 군부에서는 1945년 11월1일에 일본 본토(규슈) 공격 계획을 갖고 있었고 이후 한국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45년 7월24일 열린 군사회의에서 마샬 미국 육군참모총장은 “짧은 시일 내에 한국의 상륙을 가능케 할 여분의 상륙 함정들이 없다. 한국에 대한 공격은 규슈 상륙 작전 후에야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에 따른 희생이 상당할 것으로 보았고, 만주나 한국에서의 희생은 그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만주나 한국에서의 작전과 그에 따른 희생을 소련에게 떠넘기려 했다. 미국은 얄타회담(1945년 2월4일~11일)에서 소련에게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청했다. 브루스커밍스는 당시 미 군부는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경우 한반도가 미국에 대하여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고 보았다. 미국은 일본이 원자폭탄에 그처럼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미군의 분할 제의 없었으면 한반도는 소련군에 넘어갔을 것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8일이었다. 반면 소련군은 8월26일 평양을 점령했다. 이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38선은 미군에 의해 그어졌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미군의 발 빠른 대응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소련군의 수중에 넘어갔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38선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휴전선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분단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다음 편에서는 38선 획정 비사와 관련해 에드워드 L. 로우니 전 미 육군 중장의 회고록 내용을 소개할 계획이다.

[참고]
<한국현대사 산책>(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일월서각)
<삼팔선 획정의 진실>(이완범, 지식산업사)
<38선도 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하리마오, 새로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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