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 전문가 칼럼=기영노 평론가] 알렉산더 커싱은 캘리포니아의 땅 부자였다. 땅에 대한 욕심은 강남 졸부들 못지않았다.

알렉산더 커싱은 스키장을 갖고 있었는데, 스키장은 이용객이 없어 ‘돈 먹는 하마’나 마찬가지 였다. 1900m 고지에 있는 스키장에 편의 시설도 별로 없고, 설질도 좋지 않다는 소문 때문에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어느 날 커싱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스키장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동계올림픽을 스키장에 유치하면 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목숨을 걸고라도 해 내는 알렉산더는 스쿼밸리에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평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도 이뤄내고야 마는 그 였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즉 IOC 위원들을 설득하는데, 수백만 달러를 쓰기도 했다.

 

1960년 스쿼벨리 동계올림픽 유치는 땅 투기꾼이

 그는 스쿼벨리를 올림픽 개최지로 하면 올림픽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며 IOC를 설득해 나갔다.

결국 스쿼벨리는 라이벌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 독일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그리고 스위스의 생 모리츠를 제치고 제8회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3회 대회인 레이크 플레시드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 개최되는 동계올림픽이었고, 동, 하계 올림픽 가운데 땅 투기 꾼에 의해 개최지로 결정된 유일한 올림픽이었다.

미국 올림픽위원회와 캘리포니아 주 그리고 미국정부는 알렉산더 커싱의 토지를 임대하는 것으로 대회 준비를 시작했고, 그가 갖고 있는 스키장 계곡 전체에 알파인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등의 올림픽 시설을 준비하는데 정부 또는 주 예산을 집행했다.


알렉산더는 미국판 봉이 김선달

그러나 스쿼벨리 동계올림픽은 봅슬레이 스켈레톤 경기를 치러야 하는 ‘슬라이딩센터’를 짓지 않은 경제 올림픽으로 남아있다. 알렉산더 커싱이 슬라이딩 센터는 올림픽 이후 시설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동계올림픽 역대 금메달 2위 미국은 딱 한번 종합 1위

미국은 하계올림픽 만큼은 아니더라도 동계올림픽에서 강국으로 군림해 오고 있다. 역대 총 금메달 수에서도 노르웨이(118개)에 이어 97개로 2위를 달리고 있다. 3위 독일(86개)에게도 11개나 앞서 있다.

종합 1위는 노르웨이가 8번이나 했었고, 78개에 그치고 있는 구소련이 첫 출전한 1956년 코르티나 담폐초 대회를 비롯해서 3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모두 7차례나 종합 1위를 했었다. 구소련은 해체되기 전까지 동계올림픽에 겨우 9번 밖에 출전하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 7번이나 종합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만약 해체 되지 않았다면 노르웨이를 제치고 동계종목 최강국이 되었을 가능성애 매우 높았다.

독일이 동독 시절을 포함해서 4번이나 종합 1위를 했지만 미국은 자국에서 개최한 1932년 레이크 플레이스 동계올림픽 때 유일하게 종합 1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레이크 플레시드 올림픽 당시 미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2개로 강적 노르웨이(금메달 3개)를 제치고 종합 1위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은 홈그라운드 이점을 십분 활용 했다. 봅슬레이에 출전한 미국의 형제 선수들인 휴거트와 커티스 스티븐스 선수는 1차전에서 부진한 성적에 그치자 2차전에서는 아세텔린 램프를 사용해서 봅슬레이를 변형 시켰다.

2인승 뿐 만 아니라 4인승에서도 보다 날카로운 활주 날을 사용해서 봅슬레이를 쾌속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 후 장비를 변형하는 것이 금지 되었지만 미국은 이미 금메달 2개를 가져간 뒤 였다. 미국이 날카로운 활주 날로 트랙이 악화되는 바람에 금메달 후보 였던 독일의 4인승 팀은 썰매가 전복이 되어 경기를 끝내지고 못했다.

미국은 1924년 1회 샤모니 동계올림픽부터 줄곧 출전해 2위 3번, 3위 6번, 4위 4번 등 거의 모두 4위 안에 들었었다.

 

알파인 강국 스위스 아깝게 종합 1위 놓쳐

알파인 강국 스위스는 역대 동계올림픽 10위 이내 드는 강국이다. 역대 동계올림픽 총 금메달 수가 50개로 8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종합 1위를 한번도 하지 못했다.

1948년 생 모리츠 동계올림픽이 종합 1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였는데, 그만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출전한 1948년 생 모리츠 동계올림픽 종합 1위는 사상 처음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금메달 4개 은메달 3개 동메달 3개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스위스는 금메달 1개가 은메달로 바뀌는 바람에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로 노르웨이, 스웨덴과 총 메달 수는 10개로 같았지만 금메달과 은메달의 색깔이 바뀌는 바람에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역대 총 금메달 수 53개로 스위스에 간발의 차이로 7위를 달리고 있는 스웨덴은 생 모리츠 올림픽에서 노르웨이와 공동종합 1위를 한 것이 유리한 종합 1위였다.

파란만장 유제니오 몬티는 알파인 선수였다.

이탈리아 유제니오 몬티 하면, 그저 스포츠맨십을 발휘한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동, 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유제니오 몬티만큼 스포츠맨십을 발휘한 선수도 드믈다.

유제니오 몬티는 자국에서 벌어진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2인승과 4인승에서 모두 은메달을 땄고, 금메달에 도전하려 했었던 1960년 스쿼벨리 동계올림픽은 슬라이딩센터를 짓지 않아 봅슬레이 종목이 열리지 않는 바람에 도전장 조치 내밀지 못했다.

그후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2인승과 4인승에서 모두 동메달을 땄다.

당시 봅슬레이 2인승 경기 때, 몬티 팀은 1회전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라이벌 영국 팀의 봅슬레이 나사가 망가진 것을 알고 자신의 나사를 빼서 그들에게 주었는데 결국 영국 팀이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몬티가 남긴 말이 동계올림픽 최고 명언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이탈리아 언론들이 (나사를 빼어 준)몬티를 멍청이 짓을 했다고 비난하자, 그는 “영국 팀은 내가 나사를 주어서 우승한 것이 아니라 가장 빨리 달려서 우승을 했다”고 일축해 버렸다.

몬티는 1968년 그레노불 올림픽에서 봅슬레이 2인승, 4인승에서 모두 금메달을 딴 후 멋지게 은퇴를 했다.

그러나 몬티는 처음부터 봅슬레이 선수가 아니었다.

몬티는 처음에는 알파인 선수로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파인 선수가 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대표 선수가 될 만큼 엄청난 소질을 보였었다. 그러나 1951년 이탈리아 지역대회에 출전 했다가 무릎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봅슬레이 선수로 전향을 한 것이다.

이탈리아 알파인 계에서는 만약 몬티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알파인 선수를 계속 했다면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의 알파인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81m를 날아가는 큰 사고를 당하고 금메달 딴 ‘헤르미네이터’

오스트리아의 스키황제 헤르만 마이너는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해 활강 훈련을 하다가 무려 81m나 날아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당시 헤르만 마이어가 날아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만약 그물망이 없었다면 우주 속으로 날아 갈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끔찍한 사고였다.

그러나 헤르만 마이너는 80여m를 날아가 그물망을 2개나 뚫고 나가는 엄청난 사고를 당하고 이글 훌륭히 극복했다.


결국 마이어는 엄청난 사고를 이겨내고 기술종목인 대회전과 스피드종목인 수퍼대회전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마이어는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건너뛰어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 은메달(수퍼 대회전)과 동메달(대회전)을 추가해 모두 4개의 메달을 끝으로 은퇴했다.

 

리히텐슈타인의 기적

리히텐슈타인은 면적 160제곱킬로미터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낀 인구 3만 명의 안 되는 소국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알파인 종목에서 만 금2 은2 동5 등 9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1980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에선 여자 2관왕에 오른 하니 벤첼과 그녀의 남동생 안드레아스 벤첼의 선전으로 소련, 동독, 미국, 오스트리아, 스웨덴에 이은 종합순위 6위를 차지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동, 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올림픽 금메달을 딴 가장 작은 나라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하니 벤첼의 딸인 티나 베이라더가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남자 회전에서 메달을 딴 파울 프롬멜트 이후 30년 만에 메달을 노린다.

 

러시아(구소련) 여자피겨 싱글 금메달 딱 1개 뿐

한국의 양궁, 브라질의 축구, 일본의 유도, 아이스하키의 캐나다처럼 피겨 스케이팅은 러시아(구소련)의 효자종목이다.

러시아는 올림픽 피겨 역대 최다 금메달을 땄을 뿐 만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출전하는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도 5개 종목 가운데 3개 정도의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알리나 자기토바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 들이다. 만약 이번대회 출전 선수를 3명까지 제한하지 않았다면 러시아 선수가 최소한 5명 이상 출전을 했을 정도로 러시아의 선수층은 매우 두텁다. 그러나 역대 올림픽 여자피겨 싱글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러시아 구소련을 포함해서 러시아 선수는 딱 한명 뿐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심판의 편파판정 등으로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한국의 김연아 이탈리아의 카롤리나 코스트너 선수에게 이겨서 금메달을 가져갔을 뿐이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이후 여자 피겨는 미국이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의 세라 휴스를 비롯해서 7개의 금메달을 따서 당당히 1위에 올라있고, 올림픽 3연패의 대 위업을 달성한 소냐 헤이를 배출한 노르웨이가, 1980년 아네트 푀치, 1984년 사라예보, 1988년 캘거리(이상 카타리나 비트) 등이 3연패를 한 동독이 각각 3개의 금메달로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그밖에 한국(2010 밴쿠버 김연아) 등 9개국이 각각 한명씩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배출하고 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왜 러시아가 여자 피겨싱글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