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성화는 타오르고 많은 젊은이들은 축제 분위기에 빠져든다. 자신의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사력을 다해 경쟁 하고, 승리를 축하하고, 아쉬운 패배를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도 덩달아 흥분된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운동회만큼 즐거웠던 행사도 없지 않았던가.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어릴 때부터 올림픽 경기를 즐겨보곤 했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은 좀 등한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국이야 올림픽 개최에 국가적 자부심을 가질 단계는 지났다는 생각도 한몫했고, 뭐가 어떻게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 지 전혀 감이 없었다. 물론, 그 느껴지지 않았던 ‘감’은 지금은 구치소에 가 있는 두 사람에 의해 쑥덕쑥덕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이 대회를 선전하거나 준비하는 방식에서 오래 전 권위주의의 냄새가 났다. 국가가 요래조래 준비하면 국민은 국가만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오면 되느니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가 지금 즐기는 올림픽은 근대 올림픽이다. 기원전 776년에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고대 올림픽은 그리스에서 개최되었고, 로마제국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896년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다시 열리게 된 것이다.

초등학교때 배웠던 올림픽은 정치적 갈등과 차별을 뛰어넘는 인류애가 실현되는 장이었다. 스포츠를 통해 반목을 극복하고 잠시나마 서로를 인정하고 정당한 경쟁을 하는 숭고한 장소. 그러한 정신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준 쿠베르탱 남작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히틀러와 교감하는 인종주의자에 성차별주의자. 정치적 선동매체로 전락했다고 알려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두고도 찬사를 보낸 인물이다. 시작부터 이미 정치적 메시지를 담을 여지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올림픽은 항상 개최국과 참여국들의 ‘정치’와 관련된 구설로 시끄러웠다. 아리아 민족의 우월성을 보여주려 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뿐 아니라, ‘검은 9월단’ 사건으로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인질극 상황을 위성통신을 통해 고스란히 봐야 했던 1972년 뮌헨 올림픽도 그러했다.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은 군부정권의 선전장이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무대에서 리더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중화사상 재래의 무대였다.

올림픽은 개최 도시 중심으로 진행하게 되어 있다. 그 누구도 서울 올림픽을 한국 올림픽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스페인 올림픽으로, 런던 올림픽을 영국 올림픽으로 기억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올림픽은 늘 ‘국가주의’가 총애하는 매체였다. 이 행사만큼 국민들이 한 마음 되어 준비하고 성공을 기원하고 함께 응원하는 게 또 있을까.

그리고, 사라진 그들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현대적인 모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며 떠들썩했던 1988년 서울 올림픽. 우리 가족은 당시 마침 잠실에 살고 있었다. 지금만큼이야 아니지만, 당시에도 입시와 공부의 무게가 컸더랬다. 한창 틴에이저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잠실에 위치한 여학교에 다니다 보니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막식 때 단체로 동원돼서 몇 달 동안 공부도 못하고 매스게임 연습하게 되면 어떡하냐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푸념은 멋진 운동선수 오빠들 얼굴 가까이서 보면 좋겠다는 진정성 있는 농담으로 끝나곤 했다. 그 해 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에 동원되었던 여학생들은, 잠실의 공부 잘하던 인문계 여고가 아닌 실업계 여고에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아마도 대학 갈 공부하느라 바쁜 아이들을 데려다가 뭐하는 것이냐는 빗발치는 학부모의 항의를 감내할 수 없음을 일찍이 알아채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바라던 멋진 운동 선수와의 조우는 성사되지 못했다. 같은 반 아이 중 누군가가 ‘나도 상고나 갈걸’이라며 철없음을 넘어서 잔인하기까지 한 농담을 던졌던 기억이 난다. 부모가 공부 안 시키고 뭐하냐고 교육청에 항의할 빽도 없고 어차피 대학갈 거 아니지 않느냐는 비아냥이나 받을 거였기에, 국가적 행사인 올림픽을 위해 무더운 여름동안 훈련해야 했던 실업계 여고생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릴 주변머리따위 우리에겐 없었다.
 
어느덧 거리도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잠실의 삼전 사거리 뒤쪽에서 떡볶이를 팔던 아줌마도 없어지고, 서울의 잘 모르는 한 동네에서는 슬레이트 지붕의 우중충한 집들이 철거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집에 손님이 오면 청소도 하고 꽃도 사다놓고 옷도 깨끗이 갈아입지 않느냐며, 다 그런 준비과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불쌍한 사람들을 판자촌에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안전하고 깨끗한 곳으로 이주시키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었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그냥 믿는 척 했던 것 같다. 그래야 내 맘도 편하니까.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렇게 온 국민이 열광했던 첫 올림픽이었는데, 호돌이와 굴렁쇠 소년도 귀여웠고, ‘손에 손잡고’를 목청 높여 불렀던 것 같은데. 나에겐 서울 올림픽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사상 최악의 마스코트로 꼽혔다지만 그래도 눈에 익숙한 호돌이도 별로 반갑지 않다. 당시 진기록을 쏟아내었던 선수들도 많았을 테고 경기를 보며 한국팀을 응원하기도 했을텐데 감흥이 없다. 그런데, 가끔씩 그 때의 실업계 동갑내기 여고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는 궁금하다. 정부에서 강제이주 시킨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퉁명스럽게 떡볶이를 담아주던 아줌마는 지금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결국 내게 서울 올림픽은 폭력적이었던 대한민국의 끝자락과 맞물렸고 이제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않은 기억이 되었다.
  
30년 후의 평창은 어떠할까
 
꼭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제법 여유롭게 동계 올림픽을 치르고 있다. 아직까지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국민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학생들을 억지로 동원하고, 노점상을 때려 부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30년 전보다 확실히 우리는 성장했고 세련되어졌고 어설픈 ‘국가주의’에 홀리지 않을 만큼 자존감을 키웠다. 우리의 옹색한 모습이 들킬까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없는 살림에 곳간 다 털면서 허세 부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장했다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의 선전을 빈다. 설령 한국 선수가 지더라도 웃으며 아쉬움을 삼킬 것 같다. 흑자냐 적자냐를 가지고 올림픽의 성공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즐기고 갔는지 궁금해 할 것같다. 그렇게, 30년 후, 평창은 좀 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 믿는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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