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인천상륙작전은 비밀이 아니었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롭던 1950년 9월13일, 유엔군 지상사령관 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 육군본부 참모급 이상 장교들을 참모총장실로 소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엔군 지상사령관 겸 미 제8군 사령관 자격으로 중대 발표를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발표하는 사항은 여러분의 부인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틀 후인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작전에 참가하는 전 부대는 오늘 오전 일찍 전 기지에서 출진해 인천을 향해 항진 중입니다.” 당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1986년 펴낸 회고록 <전쟁과 휴전>에서 “지금도 왜 그때 워커 중장이 상륙작전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의문이다”라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 AP통신 특종 보도
아니나 다를까. 염려했던 일이 그날 밤 벌어졌다. 미국 AP통신에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1950년 9월13일자 대구발 AP통신 기사 내용은 이랬다. ‘유엔군, 15일을 기해 인천상륙작전 감행. 맥아더 총사령관 직접 지휘. 전 상륙부대 현재 인천으로 항진 중. 한국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 특별 발표.’ 이틀 뒤 현실화 된 인천상륙작전 내용을 정확하게 알린 특종보도였다.

AP통신 기자가 워커 중장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했던 김근배 소령을 만나 취재한 내용을 정일권 총장의 특별 발표라는 형식으로 보도한 것이었다. AP통신 기자가 김소령과 저녁에 술을 먹으면서 “정총장이 그러던데~” 하며 마치 내용을 알고 있는 듯이 떠 보자 술에 취한 김 소령이 이에 넘어가 내용을 확인해주면서 극비 사항이 언론에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AP통신 보도가 알려지면서 당연히 난리가 났다. 워커 중장은 정일권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실패하면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엄청나게 화를 냈다. 사실 한국전쟁의 명운이 걸린 최후의 승부수였던 인천상륙작전이 사전에 보도되었으니 유엔군 수뇌부로서는 길길이 뛸 만도 했다.

북한군은 왜 대응하지 못했나
정일권은 “사실 북괴군도 AP통신이 사전 보도했기 때문에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은 인천 방어를 위해 별도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만큼 적은 여력이 없었고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정일권은 AP통신에 극비 내용이 유출된 경위를 조사한 결과를 워커 중장에게 알려주었다. 당사자인 김소령은 직위 해제되었다. 만약 그때 AP통신 보도로 인천상륙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사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에 앞서 이미 두 차례 연합군의 인천 상륙 구상이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첫 번째 D-DAY는 7월22일이었다. 작전명은 ‘블루하트’.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을 출동 부대로 예정했는데 전황이 악화하면서 예정보다 일찍 출진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면서 상륙지가 포항 영일만으로 변경됐다. 다시 두 번째로 미국 본토에서 증원되어 오는 제2보병사단, 제1 해병사단을 출동 부대로 정했으나 낙동강 전선이 악화하면서 부대를 부산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 뒤 세 번째로 8월12일 크로마이트 작전을 확정했다. 이를 위한 제10군단을 일본에서 창설했다. 그러나 미 합참과 극동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해역이 협소하며 진입로가 한정되어 있다는 등 자연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인천상륙작전 앞서 두 차례 상륙 구상 무산돼
이 때문에 8월23일 오후 5시,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급파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셔만 미 해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45분 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한 과거 전쟁 사례 등을 거론하며 오히려 이들의 마음을 돌려놓은 명연설을 했다. “~나는 우리 인류의 정의와 자유가 아직도 확고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입증해 보이기 위해 이 모험을 단행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성공을 절대로 확신합니다~.” 드디어 9월8일 펜타곤은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귀관의 계획을 승인함. 대통령에게도 보고됐음.‘ 상륙작전 시행 일주일 전이었다. 9월15일 월미도를 점령한 후 맥아더는 참모들을 대동하고 현장의 적 진지를 둘러본 뒤 “만약 한 달 후로 상륙을 연기했더라면 이 섬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전쟁의 판도는 급반전되었다.

암호명 ’크로마이트‘, 261척 대함대 참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미국 함정 226척, 한국 함정 15척, 영국 함정 12척, 캐나다 함정 3척, 호주 함정 2척, 뉴질랜드 함정 2척, 프랑스 함정 1척 등 모두 261척이었다. 역사에 없던 유엔군 대 함대였다. 해군부대는 미 제7합동기동함대 예하 6기동함대와 손원일 제독이 지휘하는 한국 해군 함대였다. 상륙부대는 미제 10군단 휘하 제1해병 사단, 제1해병비행단, 한국 해병대, 한국 육군 17연대였다. 총 병력은 7만5천명,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이었다. 9월15일 오전 11시15분, 제1보가 육군본부에 날아들었다. ‘아군 상륙부대 월미도 소탕 완료, 계속 인천으로 돌입하며 잔적 소탕 중.’ 역사는 이렇게 또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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