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여정이 끝났다. 예선에서의 세 경기와 플레이오프까지, 짦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었다. 연초에 북한이 갑작스럽게 평창 동계 올림픽 참여를 결정하면서 한국 정부는 무언가 남북한 화합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했다. 그래서 선택되었던 것이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라는 답안지였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은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카드를 통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아주 뛰어난 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그리고 솔직히 메달권이라 보기 어려웠기에, 정책결정자들에게는 쉬운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선택은 쉬웠을지 모르지만, 후폭풍을 수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북한은 ‘우리는 하나’임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생경한 존재였다. 선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짧은 시간을 앞두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단일팀에 많은 국민은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의 북한의 여러 가지 도발을 생각해보면 십분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왜 저 이상한 사람들이랑 동질감을 회복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한다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지, 단일팀 하나 만든다고 해서 지금의 위급한 상황이 과연 변할까. 이런저런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도 한 몫 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1999년, 두 명의 세계적인 유명인사에 의해 흥미로운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영어 이름은 West-Eastern Divan Orchestra. 한국어로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로 번역되었다. ‘서동시집’은 괴테가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에게 감명 받고 집필했다는 시집의 제목에서 착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과 아랍의 청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이다.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 거리는 두 집단의 청년들을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넣고 화음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엄정한 오디션과 요요마같은 세계 최정상의 연주가들이 가르치는 마스터 클래스들을 통해 청년들의 재능을 키워주는 이 오케스트라의 창시자 두 명은 에드워드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지금은 작고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역작을 써낸 팔레스타인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서구가 동양을 얼마나 획일적이고 차별적인 그들만의 프레임을 통해 바라봐 왔는지를 분석해낸 저명한 학자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요절한 천재 첼리스트인 재클린 뒤프레의 남편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자신도 이스라엘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참혹한 중동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가졌던 이 두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였다.  

오케스트라 조직부터 훈련, 공연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정이 없었다. 바렌보임이라는 걸출한 지휘자, 그 이름에 힘입어 섭외된 내노라하는 연주자들의 마스터 클래스가 있었지만, 정치적 갈등과 서로에 대한 불신은 예술의 세계에서도 좁히기 어려운 간극을 만들어냈다. 시간이 흐르고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2005년 8월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말라 공연을 강행한다.

2차 인티파다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스라엘 청년들을 이끌고 라말라로 향한 것이다. 이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출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얼마나 초긴장 상태로 라말라를 방문하는 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큰 관심 속에 무사히 공연을 마친 이들이 공연장을 나오면서 환한 웃음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 이스라엘 청년들이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라말라를 떠나는 장면, 그리고 흘러 나오는 엘가의 ‘이니그마 변주곡’ 중 ‘님로드(Nimrod)’.

물론, 이 역사적인 공연과 아름다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선율도 이후의 중동 분쟁과 이-팔 갈등을 막지 못했다. 그들의 작은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증오와 분노의 골은 더욱 깊어져가기만 했다. 그래, 어차피 오케스트라 하나로 무엇을 바꿀 수 있겠어. 그걸 기대한 것이 바보 같은 짓일 뿐.

그런데, 그런 비관적인 시각에는 바렌보임조차도 동의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환상은 가지지 않는다고, 바렌보임도 인정한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표는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 가는 것이다. 상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를 나누어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해보고, 악수라도 한 번 해보고,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해보는 경험이 주는 교감, 그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 보았다.

남북한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무리한 시도였을 지도 모른다. 70년 가까이 분단되어 살아온 한 민족의 전혀 다른 모습만 부각시킨,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적개심만 부추긴, 덕분에 잘 나가던 대통령의 지지율만 까먹어 버린, 결국 TV 중계조차 중간에 끊어버린,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난 해프닝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같은 팀에서 대화를 하고 호흡을 맞추고 경기를 뛴 남북한의 선수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 지는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저들이 괴물이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확인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 ‘아는 것부터 시작이다’라는 바렌보임의 말은 여전히 울림이 있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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