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주말에 영화 블랙 팬서(Black Panther)를 봤다. 마블 픽쳐스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수퍼 히어로 영화로 현재 박스 오피스 1위를 순항중이다. 별로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영화관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도중 머리를 번쩍하니 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1960대말과 1970년대 초에 등장했던 급진 흑인 민권 운동단체였던 블랙 팬서당 (Black Panther Party). 그러고 보니 영화의 줄거리도 왠지 당시를 생각나게 한다.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 수많은 행진과 연설, 시위들의 중심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었다. 1963년 링컨 기념관에서 젊은 킹 목사가 했던 벅차오르는 연설 ‘I have a dream’은 굳이 흑인 민권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는 명연설이다. 

비폭력주의를 줄기차게 주장했고, 결국 주류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킹 목사는 결국 1964년에는 민권법(Civil Rights Act)을, 1965년에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를 성공적으로 통과시켰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셀마(Selma) 행진과 뒤이은 시위들을 통해 두 중요한 법안은 결실을 맺었지만, 흑인들의 실생활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거세지는 민권운동의 역풍으로 백인들의 흑인을 상대로 한 범죄는 증가했고, 도시 뒷골목은 빈곤한 흑인들로 넘쳐났다. 

투표권이란 걸 상징적으로 얻어냈지만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던 인종차별은 무엇 하나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젊은 흑인들이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경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탄압당하면서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와 주류 정치 세력과의 타협은 흑인 사회의 강한 비판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대척점에 서있던 또 다른 흑인 민권운동가 말콤 엑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킹 목사 스타일의 운동 전개 방식에 반대해왔었다. 비폭력을 주장하던 킹 목사와 달리,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말년에는 각자의 운동 방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손을 잡으려는 모습도 보여주었지만, 두 사람 모두 비극적으로 암살당하고 만다. 

1965년 살해된 말콤 엑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블랙팬서당이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범지대로 알려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절도한 차를 몰고 도망가던 흑인 소년을 경찰이 저격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블랙팬서당이 결성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블랙팬서당은 인종차별로 인한 불평등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바꾸려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정치 집단으로서의 흑인의 힘을 보여주고 폭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추구했다. 

무기를 들고 세상의 억압에서 신음하고 있는 흑인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 속의 급진적인 응조부는 역대급 연설 중 하나인 ‘블랙파워 (Black Power)’ 연설을 했던 스토클리 카마이클이나 프레드 톰슨을 떠오르게 했다. 

동생인 응조부를 자기 손으로 죽이면서까지 폭력 행사를 막으려 했던 세상 인자한 티차카 국왕에게서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고 백인주류사회와 손을 잡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흑인민권운동의 씨앗을 잘라버렸다는 비판을 받는 킹 목사가 보였다. 

자기들만의 평화롭고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던 와칸다의 흑인들은 시간이 흘러 미국 사회의 주류에 편입된 얼마 안 되는 운 좋은 몇몇 흑인들을 연상시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존경해 마지않던 자신의 아버지가 응조부를 죽인 후 그의 아들인 에릭 킬몽거 혹은 응자다카를 미국 땅에 버려두고 와칸다로 돌아온 것을 두고, 티찰라가 이를 비난하며 울부짖던 장면이었다. 

역사 속에서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급진주의자쯤으로 취급되는 블랙팬서당을 성공한 흑인 중 그 누구도 변호하거나 재조명하지 않았다. 사실, 블랙팬서당은 소수자에게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자본주의의 병폐에 맞서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무고한 희생만 낳고 마는 비폭력주의보다 자신들의 생명과 존엄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총을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주적인 집단이었다. 무차별적으로 흑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백인들에 비해, 블랙팬서당은 먼저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은 정당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젊고, 교육수준도 높고, 자주적이며,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이들은 그렇게 버려지고 잊혀졌고 마침내는 폭력집단으로도 매도되었다. 

티찰라와 맞섰던 응자다카는 지금 미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Black Lives Matter”운동이 떠오르게 한다. 슈퍼볼의 하프타임 쇼에 검은 가죽옷과 베레모를 입고 나타나 블랙파워 살루트를 연상시키는 안무를 선보였던 비욘세도 기억이 났다. 

티차카 국왕이 버렸던 응자다카가 수많은 상처를 몸에 새긴 채 와칸다에 나타났던 것처럼, 초라하게 사그라들었던 블랙팬서당은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진 채 다른 모습으로 미국 사회를 다시 강타하고 있다. 

숨기고 도망가고 모른 척 한다고 해서 문제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십 년 후 응자다카가 결국엔 등장했듯이, 미국 사회가 애써 모른 척 눈감으려 했던,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으니 이제는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인종차별 문제는 도돌이표처럼 되돌아 왔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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