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형 기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뮈엘 베케트(1906~1989ㆍSamuel B. Beckett)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이 작품을 20대 초반 <영상론>을 수강했던 학부시절 흑백영화로 접했다.

난해하고 지루했다. 지리멸렬한 느낌.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나무 아래에서 고도(Godot)를 기다렸고, 고도가 도대체 뭘 상징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누구는 ‘메시아(Messiah)’라고 했고, 전능자, 해방, 자유, 해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작품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대중의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는 죄수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문학계ㆍ교육계ㆍ예술계 등을 종횡 무진했던 베케트도 자신이 저술한 대표작에 등장하는 고도가 진정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했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뜨면 허무함이 남는다. 막연한 기다림과 희망의 댓가다.

최근 우리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학계ㆍ종교계 등 각 분야 가리지 않고 권력, 인맥, 명성, 돈 등을 배경으로 자신이 친 철의 장막 뒤에서 각종 부정부패와 추문을 일으킨 수많은 하늘의 별들이 추풍낙엽처럼 한순간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봄은 왔지만 봄이 아닌 것 같다.

적폐청산을 내세운 검찰은 대중 여론을 등에 업고 이들에 대한 사정의 칼날을 전 방위로 겨냥하고 있다.

특권계층인 그들은 법적 책임을 꼼수와 편법을 통해 회피할 수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인사로써 도의적 책임을 요구하는 공공(public)의 차가운 시선과 그간 그들을 세워주기 위해 화려한 무대의 객석을 채웠던 것에서 비롯된 배신감으로 인한 질타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이후 두 번이나 강산이 변했다. 그동안 국내외 적으로 IMF외환위기, 뉴욕 9ㆍ11테러, 카드대란, 미국 발 금융위기, 세계 경기침체, 유럽 발 재정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충격 등의 파고를 지나 여전히 지지부진한 글로벌 경기회복세, 저성장, 저출산 등의 국가 위기를 우리는 겪고 있다.

이제 고도를 기다리던 그 두 연기자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리더. 후천개벽의 세상. 만화 위인전을 읽고 있는 호기심 찬 아이에게 그 분이 우리에게 희망과 비전을 줬다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

최근 복귀설이 돌고 있는 잠행 중인 경제인들이 있다. 여러 대권 잠룡들도 수면 위아래에 있다.

어제가 경칩이었다. 어버이의 마음을 가진 평범한 서민들에게 청개구리가 아닌 시리고 매서웠던, 길고 긴 지난겨울의 골목 한켠의 눈얼음을 깨끗하게 녹일 수 있는 봄의 전령 같은 ‘귀인’이 내려 오셨으면 한다.

권위주의 시대 금권정치, 구습, 구태, 차별, 추문, 순응 등 기성세대의 부조리와 타성을 구차하고 장황하게 아이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먼저,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새 봄에 피어 날 산수유 꽃망울과 두껍고 거친 표피를 뚫고 움트는, 생명의 결연함을 알리는 초록 새싹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생존이고, 번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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