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양지열 편집 자문위원/변호사] 신약성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간통죄를 저지른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 어찌할 것인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데 말이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해 하나 하나 자리를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을 종교가 아니라 법의 눈으로, 가정해서 뜯어 보자. 당시는 세속과 신앙이 완전히 나눠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실정법에 가까웠다. 예수에게 여인을 데려간 것도 오늘로 치면 법조인격인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법대로” 집행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 그건 어쩌면 당시의 법 감정에 비춰봐도 여인에 대한 형벌이 지나치다는, 오늘날로 치면 양형 부당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 아닐까? 정신 차리라며 찬물을 끼얹거나, 부정 탔다며 소금을 뿌리는, 혹은 돌아가며 침을 뱉는 정도였다면, 예수라도 막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 성범죄의 여러가지 유형
 
“미투” 관련 소식이 날마다 쏟아지고 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아서인지 분별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언론에서 사용하거나 인용할 때도 제대로 그 죄를 평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범죄들을 구별해 보자.
 
우선 폭행, 협박을 수단으로 한 것들로 성폭행, 강제추행이 있다. 성폭행은 직접적인 성관계를 가진 것이고, 강제추행은 입맞춤처럼 관계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경우이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라는 용어도 자주 쓰였다. 업무상 지위 때문에 마지못해 응해준 경우이다. 상황에 비춰볼 때 원하지 않았던 것은 맞지만, 성행위 그 자체를 하기 위해 폭행, 협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계라는 말도 흔하게 잘못 쓰인다. 위계는 속임수를 썼다는 것인데, 성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속이는 것이다. 성관계가 아니라 특수한 치료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적 장애인이나 아동을 대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성희롱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지위를 이용해 혹은 업무를 빙자해 성적인 말, 시선 등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는 것이다. 직접적인 접촉은 없다.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형사 처벌 대상은 아예 아니다.
 
# 죄와 벌의 균형
 
이런 것들을 통틀어 성폭력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하지만 강제추행이나 성희롱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는데, 성폭행을 했다는 식으로 말해지는 경우를 흔하게 봤다.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해버리면 곤란하다. 3년 이상의 징역으로 벌하는 경우와 형벌을 아예 줄 수 없는 경우를 다르게 한 이유가 있다. 모두 “죽을 죄”는 아니다.
 
법은 어떤 행위에 대해 얼마 만큼 벌을 줄지를 미리 정해 놓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얼마 만큼의 무게를 가질지 알 것 아닌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과 벌금 몇 십만원이 달린 일은 다르다.
 
법으로 형벌을 정할 때 조차도 꽤 큰 융통성을 둔다. 10년 이하라고 써놓으면, 1개월부터 10년까지 사이에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벌은 피해 정도, 범행 수단과 동기, 피고인의 나이 등 여러가지를 따진다. 어느 정도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검찰, 법원은 양형 기준을 정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미투” 열풍은 이런 구별을 녹여버린 듯 싶다.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구별하지 않듯이, 얼마 만큼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차별하지 않아 보인다.  
 
# 화풀이는 본질이 아니다
 
여론 때문인지 정부가 내놓는 대책도 일단 엄중처벌을 앞세우고 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의 법정형을 2배로 늘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미투”의 본질일까? 무엇보다 피해자들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될까?

기존의 악습을 없애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정말로 효과를 보려면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당장 “펜스 룰”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미국의 펜스 부통령이 아내가 아닌 여성들과는 문제의 여지조차 두지 않는다고 한데서 비롯됐다. 아예 접촉을 끊어 버린 것이다. 21세기판 “남녀칠세부동석“ 아닌가.
 
사회 분위기에 겁부터 먹은 남정네들이 따르기 너무 쉬워 보이는 지침이다. 우리네 야당 대표도 “각시 말고 다른 여성을 차에 태워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바람에 여성들은 조직과 업무에서 소외되는 2차 피해를 입는다.
 
처벌보다 진정어린 사과를 원했던 피해자들이 곤란을 겪기도 한다. 사과를 해도 용서 대신 형벌 혹은 사회적 비난만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가해자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맞서는 것이다. 부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맞고소를 하거나 다른 일로 보복에 나선다. 딱히 그걸 막을 방법도 없다.
 
가해자가 유명인이라도 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주변의 관심을 받기조차 여전히 힘들다. 명예훼손을 저지른 범죄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기 십상이다. 사기업이라면 일자리만 잃을 수 있다. 형벌 말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려 해도 우리 법률은 정신적 피해에 인색하기 짝이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피해자들은 여전하다.
 
사회가 분노로 타오르고 나면 재만 남는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끓어 오를 수록 냉정하게 옥석을 구별해야 한다. 쉽지 않게 찾아 온 기회다. 화풀이로 잃어서는 안된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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