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최영일 편집 자문위원/시사평론가] 미투운동. 중요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봉건적인 사고방식의 남존여비 사상, 여성인권에 대한 박약한 사회의식이 존재하기에 이를 깨고 부수고 나가기 위해서 결국 양성 갈등문제에서 창조적 파괴요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다만 남과 여로 젠더를 구분하는 ‘양성’이라는 표현 보다 더 다양한 레인보우 스펙트럼이 사회적 성의 영역에 등장했다는 정도의 상식까지는 갖추어야 할 시대라는 점도 유념해 두자.

이 칼럼은 경제 분야 지면이니까 사회적 갈등을 비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마어마한 비생산을 만들어내는 에너지 뱀파이어이며 시너지를 갉아먹는 보이지 않는 설치류 같은 어떤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또한 갈등론적 시각에서는 우리사회에 참으로 오래 잠복해온 에너지 낭비 시키는 괴물이었다.
필자가 이전 정권에서 잠시 존재했던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에 가 보니 문제를 잘 짚고 있었다. 이름하여 대한민국사회 오대갈등.

첫째, 당시에는 양성갈등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젠더갈등, 그리고 둘째, 자본주의사회의 고질적 문제로 우리가 흔히 양극화라고 부르는 계층갈등, 이는 빈부갈등이기도 하고, 자산과 소득의 갈등이기도 하다.
셋째, 장유유서의 전통이 전복되는 세대갈등, 그리고 넷째, 현대 정치지형에서 선거 때마다 단골 레퍼터리로 등장 하는 지역갈등, 더하여 남은 하나가 무엇일까?

바로 이념갈등이다. 그런데 이 이념갈등이란 것이 본류를 자처하는 서구에서는 이론적, 논리적으로 소위 아시아 근대화 과정에서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피를 부르는 무엇이 되어서 역사적 상흔을 남겼는데 하필 우리나라에서는 분단과 전쟁으로까지 터져 여러 세대를 거쳐 조심스럽게 치유해야 하는 크나큰 사회적 트라우마가 되는 바람에 70년, 거의 한 세기가 되어 가는 동안 두 갈래 악한 무리들의 정치적 기득권 유지장치로 작동해왔다는 안타까운 과정이 존재한다. 굳이 미국사회와 거칠게 비교한다면 흑백 인종갈등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소위 사상적 색깔로 사람을 구분하려고 하는 이상한 습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도 그런데 이제 우리는 더 거대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 테이블에 앉게 될 전망이다. 그것은 남북갈등이라는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단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기회가 닥쳐 왔는데  우리가 이 큰 숙제를 풀고 꿀꺽 삼키면 레벨업 할 것이고,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 삼천포로 빠져 기회를 상실하면 역사의 페널티, 호된 야만으로의 퇴행을 겪을 판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명제를 하나 끄집어 내자. 지금은 구치소에서 법적 절차인 재판도 거부하고 계신 한 높았던 분이 불과 몇 해 전에 했던 말이다.
통일은 대박. 당시 언론매체에서는 ‘대박’을 영어로 무엇으로 브리핑 할 것인가 궁금해 했는데 초기에는 ‘잭팟’이라고 하였더라는 이야기가 회자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흘러 필자는 코리아 리유니피케이션 이즈 잭팟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남북의 시민들이 비무장지대를 걸어 오락가락 하며 여행도 하고, 교역도 하고, 투자도 하고, 협력도 하고, 동업도 하고, 친구도 되고, 연인도 되고, 남남북녀, 남여북남이 결혼도 하고, 가족도 꾸리고, 부산역에서,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중국도 가고, 몽골도 가고, 모스크바도 가고, 서유럽, 남유럽까지 달리게 된다면 잭팟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늘 첫 단추다. 고양이 목에 방울은 이미 달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쥐와 고양이, 고양이와 개의 입장으로 으르렁 거렸는데 방울은 달린 것이다. 이제 잭팟 터뜨리기 위한 인프라 투자가 필요하다. 이 마중물을 누군가 쏟아부어야 한다. 물론 다들 정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이 일은 기업가가 해야 한다. 필자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다. 그것은 누구인가?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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