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티 그린은 월스트리트의 마녀로 불렸다. (사진=네이버 백과사전)

[뉴시안=송범선 기자] 월스트리트의 마녀, 헤티 그린은 1834년에 태어났다.

헤티는 1865년 부모의 죽음과 함께 유산으로 600만 달러라는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후 그녀는 이 엄청난 재산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해 더 큰 돈을 모은다.

헤티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600만 달러는 지금 돈으로 환산해도 60억 원이 넘는다. 당시의 물가를 생각해봤을 때, 헤티 그린은 시작부터 부자인 요즘 들어 소위 말하는 '금수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재산이 이렇게 많았음에도 그녀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헤티가 '월스트리트의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돈을 극도로 아꼈기 때문이다.

헤티 그린은 항상 비슷한 낡은 검정 옷과 허름한 신발 차림으로 월스트리트를 거닐었다. 대부분의 월가 인사들이 근사한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것과 헤티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근사한 양복 신사들보다 헤티는 훨씬 돈이 많았다. 큰 돈을 움직이는 그녀는 주주총회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티는 귀리죽과 햄 샌드위치 같은 값싼 음식만을 먹었다.

또 헤티는 1867년 네드 그린이라는 무역업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한 이유는 [무료 투자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무역관련 정보를 공짜로 얻고 싶었던 것이다.

헤티 그린은 급락시(동그라미 표시와 같은 큰 하락장)에만 투자해 반등으로 큰 돈을 벌었다. (차트=하나금융투자)

600만 달러로 주식을 시작한 헤티가 처음부터 투자에 능했던 것은 아니다.

해티 그린은 1873년 주식 시장 전체가 급락하자 손해를 보게 된다. 처음부터 큰 돈이었기 때문에 손실로 받은 충격도 엄청났다. 이에 헤티는 자신 만의 주식 투자의 방식을 정했다.

시장이 공포에 의해 붕괴되는 순간만을 노려 주식을 사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시장은 급락과 급등을 반복한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는 법칙을 깨달은 것이다.

헤티는 시장의 지속 상승을 노리기보다는 반등시점만을 노려 타이밍을 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헤티가 투자한 금액에서 6%의 이득을 얻으면 무조건 전량 매도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많은 투자의 대가들은 "공포를 사라"라고 말한다. 헤티 그린은 이미 120여 년 전부터 이 법칙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쌓는다.

이 원칙 때문에, 대공황 이전에 사망한 헤티가 대공황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더 큰 돈을 벌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1900년 헤티의 재산은 1억 달러에 달했다. 1900년대 초반 물가로 1000억 원이 넘는 금액이기 때문에 현재 자산가치로 치면, 이 때 이미 재벌이 됐음을 알 수 있다.

1865년 600만 달러로 시작한 자산은 35년이 지난 1900년에 1억 달러가 됐다. 35년 동안 16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

요즘 투자자들의 목표 수익률이 1년에 두 배인 것과 대비해보면 많지 않은 수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복리로 꾸준하게 큰 수익을 올렸던 것이 헤티를 재벌로 만든 근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워렌 버핏의 연 수익률이 24%인 점도 이를 증빙한다.

헤티 그린의 절약은 지나쳤다. (사진=픽사베이)

부자에서 재벌이 된 이후에도, 헤티는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돈을 아꼈다.

헤티의 구두쇠 기질은 아들에 대한 태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헤티의 돈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를 뛰어넘었다.

헤티의 아들은 부잣집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부자들의 엄격한 자식 교육으로 긍정적으로 판단 할 수 있다. 그러나 헤티는 아들의 건강에도 돈을 아꼈다.

헤티의 아들은 14세 때 썰매를 타다가 무릎을 크게 다쳤다. 이때 헤티 그린은 아들의 무릎 치료에 돈을 쓰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했는데, 아들이 계속 아프다고 말하자 무료병원에 데려가서 줄을 선채 기다렸다.

무료병원의 치료는 신통치 않았고 아들의 무릎 통증은 낫지 않았다. 아내가 돈을 아끼는 행동에 혀를 내두른 헤티의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유료 병원'의 의사를 찾았다.

이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헤티의 아들은 수술을 통해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에 '일반 어머니들 모성애의 10분의 1만 있었어도 아들의 다리를 절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비판이 이어졌다.

더구나 헤티는 재벌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의사를 고용해도 부족할 판에 무료병원을 찾은 헤티의 행동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당시 언론은 헤티를 '마녀'라며 크게 비판했다.

평생 돈을 아끼며 살던 헤티는 거의 돈을 쓰지 않고 1916년 뇌졸중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월스트리트의 마녀'라는 별명은 극단적인 구두쇠였던 헤티를 비판한 적절한 용어였다.

헤티 그린이란 인물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상 가장 적절한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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