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드디어 평창 패럴림픽도 막을 내렸다 
30년 만에 대한민국을 찾아온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가 모두 마무리된 것이다. 신의현 선수의 극적인 금메달 소식에서 평창이 만들어낸 남북 문화예술단의 교류 소식으로 언론들의 관심이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이 거대한 제의는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미 대다수 언론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매듭짓지 않은 채 서둘러 정리를 끝낸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그렇게 쉽게 기억의 창고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찾아온 이 제의를 통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이 서 있는 지점을 확인했고, 지난 시간의 잘못들을 확인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확인했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 국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과, 올림픽 이후 우리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처음으로 선택한 기억 되찾기 작업을 보면 그것은 더욱 확실해 진다.

우리 국민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남북단일팀의 감동과 북한예술단의 공연, 고다이라의 포옹, 여자 컬링 대표팀의 은메달, 팀추월 경기의 팀워크, 김아랑의 노란 리본 등을 핵심기억으로 선택했다. 패럴림픽에선 신의현의 인간 승리와 휠체어 컬링, 이도연의 눈물, “우리는 썰매를 탄다”의 아이스하키팀, 그리고 영부인의 백팩과 태극기 등을 선택했다. 이는 금메달과 승자만  기억하던 이전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며 올림픽이란 글로벌 제의가 어떤 신화를 전승함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운동인지를 오롯이 체감하게 했다.

이런 체험의 감동은 올림픽 이후 일상으로 돌아온 국민들에게 기억상실증에 대한 치유작업에 몰두할 힘을 주었다. 공동체가 부여한 권한을 사리사욕을 위해 전횡하고 조작된 기억을 공동체에게 남기려고 했던, 그래서 국민들을 혼란과 절망에 빠뜨린 자들을 법에 따라 응징함으로 무너진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이 치유작업은 지난해 10월부터 의식처럼 던져 온 질문, 즉 “다스는 누구 껍니까”에 대한 해답 찾기 작업이기도 했다.

결국 해답은 기억의 복원으로 쟁취되었고 마침내 대한민국은 구치소로 수감되는 다스의 주인이자 주권 탈취자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는 또 다른 공동체의 핵심 기억이 되어 그가 저지른 국가 권력의 이권화를 다시는 용인하지 않는 지혜로 자리 잡을 것이다.

 

기억은 이처럼 자의식이고 정체성이다.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어떤 학자는 98%나 다르다고 한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 순간 변화하는 몸을 ‘나’라고 인식하게 하는 기억이 없다면, 다시 말해 기억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시켜주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식 자체가 사라진다. 그래서 영화 ‘메멘토’의 레너드는 자기 몸에 기억을 새기고,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는 기억을 담은 포스트잇을 사방에 붙이고 또 붙인다. 

물론 기억이란 지나간 과거에 대한 불완전한 조각들이다. 모든 기억을 다 완전하게 담는다면 다면 뇌는 용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기억들에 치여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뇌가 기억을 어떻게 선택하고 압축시켜서 보관하고 또는 폐기하는지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여러 면에서 기억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알려주는데, 핵심기억들이 어떻게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지, 잠재의식에 숨어있던 기억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기억이 어떻게 밀려나고 폐기되는지, 심지어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도 놀랍도록 쉽고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재료들이다.

 

효율적인 기억을 위해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보면 주인공의 수호자이자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인 ‘마우이’는 온 몸이 문신으로 덮여있다. 하나의 미션을 완수하면 저절로 생겨나는 문신은, 완수해 낸 미션을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면서 미션을 통과할 수 있게 한 해결방법을 기록한 기호이다. 이렇게 온 몸에 가득한 기호들을 해독하면 바로 그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압축된 흔적은 공동체의 기억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두 가지 보완책이 등장한다. 하나는 공동체의 기억을 이야기에 담은 ‘신화’이고, 또 하나는 그 ‘신화’를 공유하는 문화적 공간, 즉 ‘제의(ritual)’다. ‘제의’는 정제된 역할극을 통해서 ‘신화’로 응축된 공동체의 지혜를 물려주는 특별한 작업이었다. 구술되는 ‘신화’는 ‘제의’를 통해서 ‘체험’된다. ‘체험’은 몰입과 감동이란 과정을 거치면서 직접적 체험만큼이나 강렬한 개인의 기억으로 전환되며, 그 순간 시공간의 제약은 사라진다. 이렇게 획득된 생생한 기억과 강한 동질감을 통해, 공동체는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왜곡되면 신화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제의는 폭력이 된다. 

‘신화’와 ‘제의’가 공동체의 기억을 전달하는 효율적인 문화적 수단이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신화나 제의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억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이 어떻게 내용을 왜곡할 수 있을까. 사실 형식 그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다. 형식을 이용해서 기억을 왜곡함으로 이득을 얻는 ‘제관’들이 있을 뿐이다. 모든 ‘제관’들이 그렇진 않다. 하지만 제의를 주재하게 되면, 그 제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의탁하는 권한을 부수적으로 얻게 된다. 이는 쉽게 ‘권위’로 변할 수 있다. 특히 제의보다도 ‘젯밥’에 관심 있는 자들이 ‘제관’들의 ‘추종자’로 전락할 때, ‘권한’을 가진 자가 ‘권위’있는 자로 변하고, ‘신화’와 ‘제의’는 원래 기억을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원래 개인이 발견한 지식과 깨달음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신화’와 ‘제의’는 신의 이름을 빌려서 다른 권위를 부수는 탈권위적 발상이다. 이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담은 제의인 성만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성만찬을 통해 서로를 주인처럼 섬기며, 빵과 포도주를 구분 없이 나누고, 모두를 위해 죽음으로 본을 보인 신의 삶을 닮으라는 핵심기억을 전했다. 이 단순한 기억은 초기 예수 공동체가 그 혹독한 탄압에도 들불처럼 번져갔던 힘이었고, 정체성이었으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기억을 왜곡하지 않는 공동체에게는 유일한 원칙이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수많은 ‘제관’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자의적으로 무수한 권위들을 만들어서 성만찬의 단순한 힘을 무력화시킨다.

제의는 형편없이 왜곡되었고, 핵심기억은 유대교 율법으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는 거리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든 자칭 기독인들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형편이다.

 

  2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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