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대한민국에서 적폐는 왜곡된 기억들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설을 끼고 진행이 되면서, 서로 뿌리가 다른 가치관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뒤엉키는, 문화적 의미에서 아주 흥미로운 상황을 연출했다. 개최국의 민족 제의 덕분에 대규모의 고향 순례가 벌어지는 상황에, 글로벌 제의인 올림픽 덕분에 성지가 된 평창으로의 또 다른 순례길이 겹쳐졌다. 게다가 17일의 제전 기간 동안에 세 차례나 주말이 포함돼 있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글로벌 스포츠 제의와 신앙으로 선택한 종교 제의 사이의 갈등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윤성빈의 깜짝 금메달로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던 설날 연휴에는, 올림픽 제전과 차례 및 세배, 주말의 종교 제의까지, 무려 세 개의 고도로 정제된 제의들이 뒤엉키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놀라운 일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다수 한국인들은 태연히 즐겼다는 것이다. 융합과 통섭의 세상에 IT 선진국이기에 멀티플레이에 익숙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일제를 통해 근대를 경험하면서 가치관의 잡탕을 견디는 것이 체질화되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제의가 모두 의미를 잃고 박제화 되어 있기에 애초에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적어서 그랬을까?
 
제의가 힘을 잃게 되면 공동체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훼손될 여지가 넓어지고, 그 사이에 융통성이란 이름의 꼼수가 깃든다. 꼼수들은 그를 통해 이득을 얻는 제관들에게 기생하며 본래의 콘텐츠를 변화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적폐다. 적폐들이 구축되면 이는 다시 제의를 훼손해서 제의라는 형식만 앙상하게 남게 만든다. 차례와 제사 준비에 여성들의 노동 착취를 고착화 시킨 사례는 적폐가 제의를 훼손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렇게 왜곡된 제의를 통해 이득을 챙긴 제관들은 더 크고 안정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새로운 제의를 만들기도 한다. 초대교회에 없는 ‘주일 예배’라는 제의가 만들어진 것이나 그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주일 성수의 의무란 유대교 율법을 다시 부활시킨 것, 급조된 박정희 신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새마을운동이라는 제의가 생겨난 것들이 바로 그 사례들이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탁월한 애니메이션 ‘코코’엔 MB를 연상케 하는 가짜 영웅 델라크루즈가 반동인물이다. 친구를 독살하고 그의 곡을 가로채 기억을 조작함으로 가짜 신화를 완성하는 델라크루즈 덕에 진짜 실력자 헥토르는 딸에게 돌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잊혀서 완전히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코코’의 탁월함은 왜곡된 제의로 사라지게 된 기억을 노래라는 또 다른 기억술로 되살린다는 발상에 있는데, 이 애니메이션이 특히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이유는 그런 경험이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델라크루즈들은 평창 올림픽을 ‘평양 올림픽’이라고 내내 주장했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지상파 방송을 장악하고,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특정 기억들을 남기고자 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45년 해방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특히 그들에게 ‘제관’의 자리가 허용되었던 시간에는 국가 주도의 제의들, 즉 3.1절, 광복절 기념식이나 국풍 81과 같은 관변 축제, 88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의들을 통해 핵심기억들이 왜곡되어왔다. 더불어 그들은 일부 기억들(보도연맹이나 베트남 인민 학살 등)을 지우고, 가짜 기억들(학림, 부림 사건이나 반공소년 이승복 등)을 만들어 넣었다. 기억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그들이 평창 올림픽 기간 중 김아랑 선수의 헬멧에서 노란리본을 지우게 한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폭력은 국민들을 정신분열에 빠뜨렸다. 생생한 기억들을 지우거나 왜곡해야만 했던 국민들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저항하거나 적응해야 했다. 저항을 선택한 사람들은 숨어서 제의를 지키거나 죽어서 또 다른 신화가 되어야 했고, 적응을 선택한 사람들은 국가 제의와 기억을 분리시켜 핵심기억들을 다른 수단, 가령 시와 노래, 문화 콘텐츠 등에 기호화시켜서 보존해야만 했다. 이 관행은 제의의 힘을 무시하게 함으로 공동 경험이 주는 깨달음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공동체는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다. 많은 가치관의 충돌을 대수롭지 않게 눙치는 능력은 배양했지만, 공동체로부터 얻는 이득을 폄하하고 무시함으로 파편화 되어갔던 것이다.
 
 

2002 월드컵과 2017 촛불혁명은 제의의 힘을 되살렸다.

2002년 월드컵 축제는 광장의 가능성과 공동체의 힘을 깨닫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의를 통해 핵심기억을 올바르게 공유하는 법을 되살렸다. 이는 억울한 두 소녀의 죽음을 기억하는 최초의 촛불집회로 이어져 올바른 제의에 대한 경험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이 때 촛불집회라 이름 붙여진 이 제의는 광우병 투쟁을 겪으며 더욱 성숙해지고 정교해져서 2017년에 와서는 대통령의 탄핵까지 완성시킨다. 수많은 기억의 가닥들이 있었지만 촛불 공동체는 핵심기억을 놓치지 않는 집단 지성의 힘을 입증했다. 그리고 이 승리의 경험은 완전히 망하다시피 한 올림픽이란 제의를 새로운 콘텐츠로 채워 넣기 시작한다.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평화의 축제, 팀워크가 메달보다 중요한 스포츠 정신의 축제, 1등보다도 아름다운 2등을 기억하는 참여의 축제, 약자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노란 리본의 축제로 만들어 낸 것이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오는 집요한 왜곡에도, 집단 지성은 모였고, 마주 보았고, 다시 사랑하는 법을 확인했다.
 
 

‘다스는 누구껍니까’라는 사회적 문답은 놀이가 제의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의라면 흔히 성만찬처럼 거창하게, 엄숙하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놀이를 하듯이 시작된다. 핵심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서는 단순하지만 재미있는 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신화들이 드라마틱한 전개와 신비스런 현상을 담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고, 역할극이란 놀이와 결합하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MB 풍자놀이로 시작된 ‘나는 꼼수다’와 댓글조작을 댓글 놀이로 비꼰 ‘다스는 누구 껍니까’ 꼬리 달기놀이도 역시 놀이가 제의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단순하고 재미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킬 수 있었던 이 놀이들은 사회 현상이 되었고, 문화적 힘을 얻게 되었으며, 결국 MB의 목줄을 죄는 제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선거라는 제의를 앞두고 또 다시 어떤 핵심기억을 공유할 것인가

선거는 민주주의를 정치 시스템으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제의이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더욱이 개헌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국민 투표까지도 함께 치러질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어 이번 선거의 의미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정치인들은 지역과 지역의 갈등을 조장하고, 지역 안에서의 대립과 분열까지 심화시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한다. 심지어 거대 정당들끼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선거구제 개편조차 무산시키는 모습을 보면, 선거란 제의에서 반드시 공유해야 할 핵심기억이 왜곡될 가능성마저 짙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알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어떤 지혜를 공유해야 하는지. 애니메이션 ‘코코’의 마지막 노래에도 이 지혜가 담겨있는데, ‘코코’의 주인공 미구엘은 죽은 자의 세상에 다녀온 뒤 ‘잊지 마(proud corazón)’란 노래를 부른다. 직역하면 ‘내 자랑, 내 심장’ 쯤 되는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생명이 자기 정체성이자 자부심이란 인식 하에, 그 심장이 뛸 때마다 공동체와 구성원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이 영원할 것임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한글 가사는 이 메시지를 더 구체화하고 있는데, ‘우린 가족이야 / 세상에 알려 큰 소리로 / 너와 나의 인연 끝없이 계속돼 / 눈 감는 그 날까지 잊지 마’라는 노랫말 끝부분은 두 가지를 확인시켜 준다. 첫째, 가족이 모여 이루는 더 큰 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둘째, 기억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 그렇게 역사가 된 기억의 주체는 표로 기억조작자들을 응징할 것이고, 그렇게 적폐들을 해소해 나갈 것이며, 그 과정에서 미래가 이미 지금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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