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백성문 편집 자문위원/변호사] 살인범의 누명을 쓴 한 소년이 재심을 통해 석방되고 진범에 대한 유죄판결이 확정되는데 걸렸던 시간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15세 소년은 단지 끔찍한 범행 현장을 목격했을 뿐이었다. 경찰은 이 소년을 감금해 가혹행위를 하였고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허위 자백을 했다. 경찰의 가혹행위를 폭로하자 1심 법원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며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소년은 절망했다. 누구도 소년의 외침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항소심에서 하지도 않은 본인의 범죄를 시인했다.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대법원에 상고도 포기했다.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외면했다. 영화 재심의 모티브가 됐던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 이야기다.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 전말
 
2000년 8월 10일 새벽 두시경 당시 15세였던 최모군은 커피배달을 가던 중에 범행 현장을 목격했다. 택시 기사 유모씨를 12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최모군은 누군가 뛰어가는 것을 봤다고 신고한 최초 목격자였다. 그런데 3일 뒤 경찰은 최모군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다. 그때부터 가혹행위가 시작됐다. 15세 소년을 여관에 감금하고 자백을 종용하며 잠도 재우지 않으며 폭행을 지속했다. 결국 이 소년은 견디지 못했다. 본인이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한 것이다.
 
사실상 고문에 의한 자백을 토대로 나머지 증거를 끼워 맞춰 검찰로 송치했다. 흉기가 발견되지 않자 최모군이 오토바이 뒤에 가지고 다니던 칼이 있었다고 꾸몄다. 일사천리로 사실상 각본에 맞춰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검찰은 최모군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건을 제대로 보강조사조차 하지 않은 채 재판에 넘겼다. 누군가를 12번 찔러 살해하면 찌른 사람의 몸과 옷에 혈흔이 튄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사상식이다. 그런데 최모군의 몸과 옷 어디에서 피해자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최모군은 재판에서는 잘못된 사실이 바로잡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심에서 경찰의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제대로 된 증거조차 없었으니 당연히 뒤집혀야 할 결과였다. 하지만 1심 법원은 반성 없이 범행을 부인한다며 15세의 소년이 받을 수 있는 법정 최고형 15년을 선고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법원에서조차 바로잡아지지 않는 것을 본 최모군은 자포자기 했다. 항소심에서 형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범행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항소심은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최군은 상고조차 포기했다.
 
2003년 6월 경 군산에서 발생한 택시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의 진범이 익산에 살고 있다는 첩보를 접했다. 진범 김모씨의 친구인 임모씨로부터 진범이 김모씨라는 진술을 받았다. 김씨와 임씨를 모두 소환해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범행에 대한 죄책감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고 이 내용이 경찰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자백한 내용이 구체적이고 범행 당시의 상황과 완전하게 맞아떨어졌다. 경찰은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진범을 잡았다고. 하지만 검찰은 진범은 교도소에  있다며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했다. 그 이후 김모씨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진술을 번복했다. 이때도 바로잡지 못했다.
 
최모군은 9년 7개월을 복역하고 2010년 만기 출소했다. 출소후 살인자라는 오명으로 두문 불출하던 최모군은 2013년 3월 박준영 변호사를 통해 재심을 신청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6년 11월 최모군에 대한 무죄판결이 확정되었다. 사건 발생 16년만에 최모군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범인 김모씨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 결국 2018년 3월27일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되었다. 끈질기게 진범을 추적해 왔던 황상만 반장이 없었다면 재심조차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이 규명되기까지 15만4536시간이 걸렸다.
 
#사법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

이 사건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이 아니다. 강압수사로 없던 사실을 만들어 내 사건을 종결한 것이다. 그들은 살인 사건 범죄 해결로 표창까지 받았다. 무리한 실적주의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들에겐 진실은 의미가 없었다. 가장 만만한 취약계층인 15세 다방배달부는 죄를 뒤집어 씌우기에 최적화된 존재였던 것이다. 1999년에 발생한 대표적인 오심 사건인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사건"에서도 범행과 상관 없는 지적 장애 청소년들이 대상이었다. 현장 검증에서 경찰이 남겼다는 말이 잊혀지질 않는다 "너희는 배우고 나는 감독이다" 그들에겐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번 사건은 바로잡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경찰에서 받아낸 허위 자백은 허술하기 이를데 없었다. 검찰도 그 이후 법원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게다가 진범이 자백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잡아지지 않았다. 바로잡아지면 당시 수사를 한 경찰, 검찰 그리고 재판을 했던 법원까지 오명을 써야 했으니 진실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힘 없고 빽 없는 사회적 약자였으니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법이 만인에 평등하다는 말을 법조인인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최모군은 억울한 옥살이를 한 댓가로 형사 보상금 8억4천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받아도 잃어버린 10년은 돌아오지 않는다. 최모군을 범인으로 만들고 진실을 외면하고 바로잡지 않았던 경찰과 검사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검사는 아직도 현직에 있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최군 앞에 무릎꿇고 사과하는 것이 시작이 되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영화 재심의 대사가 떠오른다. "요즘 헬조선이라고 하지? 근데 그 헬이 더 살기 좋아. 거기는 죄지은대로 벌 받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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