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얼마 전 세계 역사탐방의 의미를 가진 한 TV프로그램에서 멕시코를 방문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타코(Taco), 코로나 맥주, 데킬라, 판초 모자 등으로 익숙한 태양의 나라, 멕시코. 최근의 쏟아지는 여행 프로그램들이 먹방이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휴양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과 달리,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부럽기 그지없게도,이들은 멕시코의 대통령궁을 방문해 그 곳의 계단을 따라 그려진 디에고리베라의 거대한 벽화를 관람하는 행운도 누렸다.

프리다 칼로를 매우 좋아한다는 여배우의 감탄과 함께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리베라의 악행(?)을 뒷담화 하며 그 웅장한 벽화는소개되었다.

잠시나마 볼 수 있었던 리베라의 대통령궁 벽화가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방송에서는벽화 속에 숨어있듯 그려진 프리다와 그녀의 동생 크리스티나의 이야기가 주로 나왔는데, 그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 벽화는 그보다 훨씬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산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가 기나긴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난 건 1920년, 독립한 지 거의 100년 만이었다. 그나마 안정되어 정부다운 정부를 꾸려나가기 시작한 오브레곤 정부는 멕시코라는 국가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태생적 장애, 바로 ‘멕시코인은 누구인가’이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 아즈텍 문화와 함께, 그 문화의 주인공인 인디오들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숨죽여 지내왔다. 태양의 땅을 점령한 스페인 인들은 본격적으로 정착하고 살면서 인디오들과도 섞이게 되었고 후손도 가졌는데, 우리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메스티조(mestizo)’가 바로 이들이다. 곧 스페인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유럽인들이 건너왔고 이들은 멕시코의 상류층으로 자리잡았다.멕시코 인구는 크게 네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성골 유럽 백인, 멕시코에서 태어난 유럽인, 메스티조 그리고 인디오였다. 물론, 열거한 순대로 상류층이었고 인디오는 사실상 노예와 같은 존재였다. 인종으로 나뉜 계급의 벽은 두꺼워지기만 했고 그렇게 20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미 급속도로 늘어난 메스티조는 멕시코 인구의 60%에 달했고, 인디오 인구가 30%정도였다. 백인은 10%가 채 안 되었다. 그렇다면, 멕시코라는 이 나라는 누구의 나라인가. 멕시코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것일까.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들끼리 모여 살아온 우리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반만년 역사의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믿고 ‘한민족’이라는 민족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는 달랐다. 침략자와 그들과의 혼혈 자녀인 메스티조가 절대 다수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멕시코의 기원을 어디부터 삼아야 할 지 깊이 고민한다. 멕시코인의 정체성은 메스티조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렇다면 스페인과 유럽으로부터 유린당한 식민지사를 멕시코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 누구도 자랑스러운 조국의 시조를 정복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와 ‘메스티조 민족주의’이다. 아즈텍 문화를 일구었던 인디오들을 멕시코의 기원으로 삼고 이들의 전통과 문화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인디헤니스모’를 통해 자연스럽게 인디오를 멕시코 역사로 유입시켰다. 또한 현재 멕시코인의 과반이 넘는 메스티조는‘선’을 상징하는 인디오와 ‘악’을 상징하는 스페인 및 유럽 사이에서 창조된 승화된 존재, 좀 더 정확히는 ‘우주적 인종(cosmic race)’으로 자리매김 시킨다. 폭력과 정복으로 점철된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적이고 위대한 멕시코인의 기반이 된 것이다.그렇게 멕시코 민족주의는 완성이 되어 갔다.

이 원대한 작업을 설계한 당시 교육부 장관 바스콘셀로스에게 주어진 다음 사업은, 이토록 아름다운 멕시코 민족정체성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체 국민의 80%가 문맹이었기에, 이 영민한 교육부 장관은 벽화라는 방법을 택한다. 당시 민중 벽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세 명의 멕시코 화가 중 디에고리베라가 뽑혔던 것은 그가 다른 두 명(오로스코와시케이로스)에 비해 가장 덜 급진적이고 사실상 어용화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멕시코 정부의 뜻대로,리베라는아즈텍 문화를 시조로 한 거대한 벽화를 그려냈다. 고대 멕시코의 케찰 코아틀의 전설, 아즈텍의 마지막 군주였던 쿠아우테목과 그의 전사들, 멕시코 혁명과 미국의 침략까지 아플수록 더욱 민족적 감성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주제를 통해,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벽화를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슬픈 점은, 리베라가 그려낸 벽화 속 인디오는 작금의 현실과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는 상상 속의 인디오라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끌어 냈던 만큼, ‘인디헤니스모’는 처참하리만큼 빈곤한 현실 속의 인디오와 너무나 괴리된 이야기이고, 실제 정치인들도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만 인디오가 필요했다. 여전히 멕시코 사회에서 인디오는 가장 하층계급에 분포되어 있고 그 누구도 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민족은 상상 속의 공동체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현실 속의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바 있다. 멕시코 인디오는 상상 속의 ‘멕시코 민족’을 위해 전설이 되고 또 버려지다시피 남겨졌다. 비참한 현실 속으로 돌아온 인디오들은 과연‘멕시코 민족’이라는 동료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만일 그 동료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다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떠오른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