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아이러니하게도 5.16군사정변은 1960년 4.19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4.19 혁명이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5월2일,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퇴역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4.19의 민주적 처리로 내외의 박수를 받고 있는 이 시기에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송요찬은 “군의 단결을 파괴하려는 장성이 있는데 앞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분노했다.

5월5일 부산으로 가 박정희 소장을 만나고 온 김종필 중령은 5월8일 육사 8기 동기생들을 만나 정군(整軍)을 토의했다. 김형욱 길재호 신윤창 석창희 최준명 오강호 오상균 중령 등이었다. 이들은 4.19 혁명 정신으로 군도 정군을 해야 한다는 정군 건의서를 국방장관에게 제출하기로 했다. 이른바 ‘연판장 사건’이었다. 5월17일 김종필 최준명 중령, 18일에는 김형욱 옥창호 석창희 중령 등 5명이 국가반란 음모 혐의로 체포됐다. 이 사건은 군부에 큰 파문을 불러와 동기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결국 송요찬 참모총장이 물러나는 사태로 이어졌다. 

 

5.16의 시작, 충무장 결의

9월10일, 충무로에 있던 충무장에 모인 11명의 장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추진해 온 정군 운동을 지양하고, 민주당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거국적인 무력혁명을 단행함으로써 정군의 목적을 달성할 것을 결의했다.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정문순, 사법 길재호 등 역할도 분담했다. 5.16의 시작이 바로 ‘충무장 결의’였다. 이들은 2개월 후인 11월9일에는 서울 신당동에 있던 박정희 소장 집에 모여 유언장을 쓰며 실패했을 경우 다 같이 목숨을 버릴 것을 서약했다.

 

5.16 군사정변은 3전4기였다.

1961년 3월10일 김종필 옥창호 중령은 박정희 소장과 만나 활동 지침을 받았다. ① 서울 근교 부대를 한정 사용하고, 전후방 부대는 남침에 대비해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② 거사일은 우선 4월19일로 하고 이때 실패할 경우 5월 중순으로 한다 ③ 후방 및 예비사단은 박소장이 직접 담당한다. 단 서울의 행동부대는 김종필 중령이 담당한다 등이다. 4.19일에 예상되는 학생 시위를 빌미로 거병하는 시나리오였다. 이미 박정희 소장은 참모총장이 미국에 가는 5월5일 사흘 뒤인 1960년 5월8일 거사를 계획했다가 4.19가 일어나면서 무산된 바 있었다.

4.19계획은 5.8 계획에 이은 두 번째 거사 모의였다. 이들은 폭동 진압을 위해 출동한다는 구실로 중앙청 반도호텔 육군본부 등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공수단을 비롯한 특수부대는 요인들을 체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원 예상 병력은 6천6백명이었다. 거사를 10여일 앞둔 4월7일 박정희는 명동 양명빌딩 옥상에서 ‘동지’ 29명을 만났다. 5기생 4명, 8기생 16명, 8 특별기수 2명, 9기 4명 등이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35세였다. 박정희가 44세로 제일 많았고, 공수단 대위였던 차지철이 27세로 나이와 계급이 제일 낮았다.

박정희는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지도부도 정했다. 총책임자는 박정희 소장, 작전반 책임자는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행정반 책임자는 육본의 이석제 중령이었다. 그러나 4.19 1주년 기념일이 의외로 조용하게 지나가면서 거사 계획은 무위에 그쳤다. 김종필은 대구로 박정희를 찾아가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자”고 말했다.

 

5.8 – 4.19 – 5.12 거사계획 실패 그리고 5.16

4월28일 다시 박정희의 지시가 떨어졌다. 5.12 계획이었다. ① 공수단은 방송국 점령, 요인 체포 등의 임무를 수행 ② 해병대 및 A,B사단 병력은 시내 요소 및 서울 외곽에 배치 ③ 제0군단 포병단은 예비 병력으로 확보 등이었다. 그러나 이종태 대령이 통근버스 안에서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장세현 중령을 포섭할 생각으로 거사 계획을 털어놓았다가 비밀이 새어나갔다. 결국 이대령이 구속되고 소문이 퍼져나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택일한 것인 5.16이었다. 박정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변동은 없다. 최후의 1인까지 싸워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16일 오전 3시20분,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한강 인도교를 건넜다. 5.16이었다. 박정희는 1개 사단도 안 되는 3600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을 장악했다.

 

거사 계획은 비밀이 아니었다

‘박정희 세력’의 거사 계획은 사실 비밀이 아니었다. 김종필은 <김종필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들의 거사 계획은 여러 쪽에서 올라갔다. 그럼에도 보고를 받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군 수뇌부는 신빙성을 두지 않든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나태함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16을 앞두고 박정희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것은 오후 5월15일 8시쯤이었다. ‘무장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는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났다는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30예비사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간 것이다. 장도영은 육군 헌병대에 ‘6관구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박정희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밀어부쳐야 한다’고 말했다. 담배를 문 채 30여 분을 앉아 있던 박정희는 ‘가자, 나를 따르라. 가다 죽더라도 올바른 역사가 있다면 평가해줄 것이다’라고 했다.”

장면 전 총리도 비슷한 내용을 진술한 바 있다. “5월16일 일주일 전에 군 일부에서 군사쿠데다 모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전에도 다른 부류의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내사시킨 적이 있었다. 이번이 네 번째 정보였다. 나는 장도영 참모총장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물었다. 장도영은 ‘뜻밖의 말씀입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태연하게 답했다. 1961년 5월 초 일이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장도영에게 말했다. ‘참모총장이 알아서 보고해야 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런 내 말에도 장도영은 ‘알아 보겠습니다마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참고]
<김종필 증언록> (김종필 지음. 와이즈베리)
<대사건의 내막> (한국홍보연구소)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