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61년 5월16일 새벽 2시.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경호실을 통한 보고였다. 당시 장총리는 반도호텔 809호실에 머물고 있었다. 옆방인 808호실이 경호실이었다.

장도영은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며 “아무 염려 마시고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라고 말했다.

장면은 “염려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라고 물었다. 장도영은 “했습니다. 곧 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장면은 경호원을 호텔 현관에 대기시키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장도영을 기다렸으나 그는 오지 않았다.

얼마 후에 총성이 요란하게 울렸다. 장면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호텔을 떠났다. 5.16쿠데타군이 반도호텔로 들이닥치기 불과 10분 전이었다.

장면이 제일 먼저 간 곳은 반도호텔(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 앞 길 건너 미국 대사관이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 장면은 무교동-청진동을 거쳐 과거 한국일보사 앞에 있던 미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CIA한국분실장이었던 드실방의 집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상통제로 인해 출입을 거부당한 것이다. 당시 장면은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장면을 수행하던 조인호 경감은 경비병이 신원을 묻자 “정부 고위인사이다”라고만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장면은 혜화동 깔멜수녀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면의 아내가 전부터 친교가 있던 수녀원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받아 방 하나를 얻었다.

정일형 김영선 송원영 등 장면 내각의 주요 각료들과 미8군 사령관, 쿠데타군과 진압군, 미국 대통령까지 장면을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40시간의 ‘침묵’이었다. 한국현대사에 있어 가장 긴박한 2일을 그는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 장면의 측근이자 사돈인 한창우가 장면 운전기사의 소재지를 찾아내어 장면을 찾아냈다.

장면이 수녀원의 40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장면은 회고록에서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므로 보류해 둔다”라고만 기록했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면은 상황이 종료된 5월18일 정오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장면이 사임을 밝히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보선 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윤대통령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17일쯤에는 알게 되었다.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윤대통령이 그렇게 나오는 한 별 도리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윤대통령은 쿠데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다”라고 회고했다.

윤대통령 뿐 아니라 장도영까지도 쿠데타에 가담하게 되고 보니 장면의 총리 사임은 필연적이었다. 장면은 5.16이라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은신으로 일관하며 사태를 방관했다. 피할 수 없는 장면의 책임이다.

장도영이 쿠데타에 공식 가담한 것은 1961년 5월16일 오후 4시였다. 야전군의 진압군 출동을 막기 위해 윤보선 대통령의 밀사가 이한림 1군 사령관을 찾은 시간은 5월17일 오후 2시였다.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은 17일 오전 참모회의에서 쿠데타군 진압 계획을 확정했고, 오후에 이한림 장군을 만났다.

장면이 만일 5월17일 정오까지라도 모습을 드러냈다면 미군과 함께 쿠데타군을 진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면의 소재가 파악된 것은 5월17일 저녁이었다. 6시간의 시간차로 5.16은 역사의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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