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사진=픽사베이)

[뉴시안=송범선 기자]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총에 맞아 살해된다.

이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차 세계 전쟁은 독일의 팽창주의 전략이 기인한 바도 크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강대국들끼리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에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켰다.

전 세계 증시는 곤두박질 쳤고, 유럽의 중앙은행이 재할인율을 인상하자 채권 수익률이 급등했다. 영국의 영구채 가격도 급락해 계속 최저가 기록을 경신했다.

영구채란 원금은 상환하지 않고 이자만 지급하는 채권이다.

유럽과 조금 떨어져 있던 미국의 주식시장도 20~30% 급락했다. 안전자산인 금 시세는 급등했고, 이자율은 상승세를 나타냈다.

이에 뉴욕 증권거래소의 거래량은 30만주로 대폭 하락했다. 이후 투매 현상이 일어나면서, 거래량이 급증해 1907년 이후 최대치인 130만주까지 폭증하기도 했다.

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은 미국 증권에 50억 달러를 투자해 놓고 있었다.

유럽 투자자들은 자국의 전쟁물자를 마련하기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미국에 투자해놓은 자금을 서둘러 매도했고, 미국 투자금을 축소했다.

전쟁 직전인 7월 밀 9300만 리터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던 독일은 전쟁 직후인 8월에는 한톨도 수입하지 않았다. (사진=픽사베이)
전쟁 직전인 7월 밀 9300만 리터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던 독일은 전쟁 직후인 8월에는 한톨도 수입하지 않았다. (사진=픽사베이)

당시 미국 산업의 근간은 여전히 농업으로, 외국으로의 수출량은 상당했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더이상 농산물을 수입 및 소비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의 농산물 수출은 급감해 미국의 농업이 붕괴될 것이란 말이 나돌았다.

전쟁 직전인 7월 밀 9300만 리터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던 독일은 전쟁 직후인 8월에는 한톨도 수입하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 마침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등 세계 주요 증시가 거래를 중단하고 휴장을 선언했다.

뉴욕 증권거래소에서도 고위간부들이 휴장을 검토했다.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 밤늦게까지 논쟁이 이어졌다.

거래 지속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휴장이 오히려 패닉현상을 부채질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1907년 금융공황에서도 거래소가 중단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휴장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시에는 JP모건이라는 영웅이 있었다"며 "현재는 그런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JP모건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계속 된 것이다.

결국 뉴욕증권거래소는 휴장하기로 결정했다.

월스트리트 증권브로커들의 영업도 중단됐다. 이에 수수료 수입이 없어지자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

거래소 휴장에 등장한 길거리 거래 시장. (사진=픽사베이)
거래소 휴장으로 월스트리트에는 길거리 거래 시장이 등장했다. (사진=픽사베이)

이후 거래소의 휴장이 장기화되자, 월스트리트에서 예전처럼 길거리 주식 거래 시장이 재등장했다.

뉴 스트리트 거래소인 셈이다.

이후 증권거래소는 휴장 3개월만인 12월12일 주식거래를 재개했다. 이후 공매도와 선물거래도 재개되며 1915년 4월에는 완전히 정상 기능을 되찾았다.

이후 뉴욕 증권거래소는 현재까지 단 며칠 동안만을 제외하고는 휴장을 하지 않았다. 1929년 대공황때도 거래소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현재는 추수감사절 휴가를 빼고는 3일 이상 휴장할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재개장한 1914년 12월 30일 하루거래량은 20세기 최저치를 기록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전쟁의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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