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669,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12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불운했다. 1960년 케네디에게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하고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떨어진 상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으나 “닉슨은 끝났다”는 말이 나올 때였다.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을 만나주기를 청했다. 이동원의 애기를 들은 박정희는 “그 사람 이미 끝난 사람인데~” 하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닉슨은 박정희와 점심도 하지 못하고 커피 한 잔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입장이 곤혹스럽게 된 브라운이 그날 저녁 닉슨과 장관들이 함께 하는 만찬을 추진했으나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박정희가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하면서 이 또한 모양이 구겨졌다. 이동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미 대사관 만찬장에 들어서니 미군 장성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식사 내내 닉슨의 표정은 텅 빈 좌석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동원은 “기생집으로 모실까요?”라고 닉슨의 의향을 물었다. 그는 “좋소!”라고 답했으나 이번에는 브라운이 다음날 새벽 일정이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닉슨과 이동원은 미 대사관에서 장시간 대화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우리와 달리 닉슨은 동남아와 일본 방문에서는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미래는 알 수 없다며 닉슨에 투자’했던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홀대 받은 닉슨, 대통령 당선되자 보복

절치부심한 닉슨은 2년 뒤인 1968년 제 3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했다. 박정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닉슨은 취임하자마자 ‘닉슨독트린’을 내세우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외교 라인이 총가동 되며 박정희-닉슨 정상 회담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6개월이 지나서야 답이 왔다. “휴가 때 별장에서 봅시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을 휴가 차 놀러간 별장으로 오라니-. 박정희는 이런 과정을 거쳐 1968821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샌프란시스코호텔에서 닉슨을 만났다.

박정희, “닉슨은 나를 속국의 제왕 대하듯 했다”

이동원은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닉슨과의 정상회담 이후 박정희가 자신에게 한 얘기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내 약소국의 비애를 비참하게 맛보았소. 난 그날 비통함의 연속이었소. 약속 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호텔에 가면서도 난 최소한 호텔 로비에서 닉슨이 맞아 주리라 기대했었소. 그러나 호텔 로비는 물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릴 때도,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닉슨은 나타나지 않았소. 내가 방에 들어선 후 왼쪽의 큰 문이 다시 열리기에 보니 그쪽 방 저쪽 구석이 닉슨이 선 채 날 맞이하는 게 아니겠소. 물론 걸어오지도 않았고. 마치 속국의 제왕을 맞이하듯 했단 말이오. 그뿐만이 아니오. 저녁 식사 땐 시시껄렁한 자기 고향 친구들 불러다 앉혀놓곤 같이 식사하라는 게 아니겠소. 내가 아무리 1966년 닉슨이 방문했을 때 섭섭하게 대했기로서니 너무한 것 아니오.

 주한미군 철수 등 정국 불안으로 이어지며 10.26으로 연결

닉슨의 보복은 집요했다. 베트남전을 끝낼 때도 미국과 한국은 함께 협의하게 되어 있으나 닉슨은 이 약속을 깡그리 무시하고 키신저를 시켜 월남전을 끝냈다. 키신저가 북경과 파리를 오가며 베트남 대표와 노벨평화상 문안을 작성할 때도 우린 그저 쓴맛 다시며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런 흐름은 닉슨 이후 카터 행정부로 이어졌다. 박정희는 카터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국과의 불화는 정국 불안을 불러 10.26으로 연결됐다.

이동원은 “돌이켜보면 닉슨의 12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12일이 주한미군의 첫 철수를 낳았고, 그것은 박대통령에게 위기 의식을 안겨 줘 이후 ‘10월 유신’ ‘핵개발’ 등 자신의 불안을 보전해 줄 악수를 두게 됐다”고 회고했다. ‘닉슨의 12일’이라는 나비 효과는 10.26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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