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71년 4월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일대 결전이었다. 박정희는 이번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호소했다. 김대중은 집권하면 지방색을 일소하고 인재 등용에도 차별을 없애겠다고 주장했다. 투표 결과 박정희는 634만 표를 얻어 539만 표를 얻은 김대중을 94만 6928표 차로 이겼다.

이어 같은 해 5월25일에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전국 153개 지역구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공화당은 113석, 신민당 89석, 국민당 1석, 민중당 1석을 얻었다. 비례대표는 51석이었다. 공화당은 원내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신민당은 1/3이 넘는 의석을 확보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균형 국회를 형성했다. 7월26일 공화당 백두진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며 개원식을 열었다.

8대 국회는 야당 의원이 대거 진출하면서 이른바 ‘시녀국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국회에서 강도 높게 논의되었던 것이 상징적이다.

김성곤 등 공화당 4인방, 박정희 뜻 어기고 오치성 해임건의안 통과시켜

이런 가운데 일어난 공화당의 10.2 항명 파동은 유신체제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국회는 10월2일 신민당이 9월30일 제출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오치성 내무부장관, 신직수 법무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표결했다. 이 가운데 오치성 내무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찬성 107, 반대 90, 무효 6표로 가결되었다.

해방 이후 1955년 임철호 농림부장관, 1969년 권오병 문교부장관에 이어 세 번째로 국무위원이 해임됐다. 공화당은 표결에 앞서 부결하기로 방침을 정했는데 왜 가결됐던 것일까.
당시 공화당의 실권은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 등 이른바 ‘4인 체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는 김종필. 김종필 내각에 오치성 내무부장관이 들어가면서 4인 체제와 가까운 경찰 등을 인사에서 거세하자 이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이런 가운데 야당에 의해 해임건의안이 제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의 뜻과 달리 오치성 해임안에 찬성하기로 비밀리에 뜻을 모았다. 3억원 가까운 자금도 풀었다.
이들은 평소 자신들에게 신세를 졌던 의원들을 집중 공략했다. ‘대통령도 오치성의 가결을 묵시적으로 양해했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10월2일 토요일 오후 1시2분, 백남억 국회의장은 의사국장이 가져온 메모를 읽으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었으므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신민당 의원들 의석에서는 와! 하는 함성이 일었고 의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벌떡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이 일이 유신으로 이어지는 의정 종언의 시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3인 의원들 끌려가는 등 4인 체제 무너져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이경재 전 의원이 쓴 <유신쿠데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뜻한 대로 일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날 오후 김성곤 길재호 등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컨트리클럽(지금의 어린이회관)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각 박정희 대통령도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골프장에 도착했다. 오치성 해임건의안 가결에 상한 심기를 풀기 위해서였다. 클럽하우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박대통령의 눈에 김성곤 길재호 등이 눈에 띄었다. 여느 때 같으면 대통령이 왔다는 말에 뛰어와 인사해야 할 처지였다. 그날따라 그들은 대통령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자마자 거기를 떠났다. 박대통령이 격노할만도 했다.


박대통령은 나인홀을 돌고 청와대로 돌아갔다. 골프장에서의 조우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김진만은 훗날 ‘대통령의 공식적인 지시에 항명을 했으면 골프를 치러 갈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찾아 각하 죄송합니다, 오씨 한 사람 갖고 뭘 그러십니까 하고 백배사죄했으면 일은 원만하게 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운을 자초했다’고 회고했다.

그날 저녁 박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누구든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주동자를 색출 조치하시오’라고 지시했다. 김성곤 김창근 강성원 등 23명의 국회의원들이 기관에 끌려갔다. 김성곤은 콧수염까지 뽑히는 수모를 당했다. 김성곤 길재호는 공화당을 탈당해야 했다. 당시에는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했다. 실세(實勢)에서 하루아침에 실세(失勢)가 된 것이다. 정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국회무력화로 이어지며 10월 유신 터 닦아

김종필은 <김종필의 증언>에서 이와 관련해 김성곤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한다. ”내각책임제에서 총리를 한 번 지내는 게 소원이었다. 여야 의원들 다수가 내 세력 하에 있으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얼마나 무서운 권력을 갖고 있는지 그때 알았다. 의원들 다수를 가지고 저항하면 대통령인들 덮어놓고 자기 고집을 부리겠느냐, 타협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10.2 항명 파동의 여파는 국회의 무력화로 이어졌다. 이것은 또 국가보위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12.6 비상사태를 불러왔다. 나아가 1972년 10월17일, 대통령에게 국방 경제 언론 등에 대한 비상대권을 부여한 10월 유신을 단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8대 국회는 출범 2년 3개월 만에 좌초하며 ‘유신암흑기’가 도래한다.

[참고]
<대통령을 그리며> 이동원
<이것이 국회다> 강인섭 이호진
<김종필 증언록>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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