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총리는 한국 정치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온 몸으로 관통한 당대의 거물이었다.(사진=뉴시스)
김종필 전 총리는 한국 정치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온 몸으로 관통한 당대의 거물이었다.(사진=뉴시스)

[뉴시안=한기홍 편집국장] 1961년 5·16에서 2004년 4·15총선까지 43년간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한국 역사의 무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약한 주인공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면서 권력과 세상의 원리를 관찰해왔다.

우리 시대의 이 거물이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미국의 존 F.케네디는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고 했다. 진실은 거짓보다 신화에 무너지기 쉽다는 얘기일 것이다.

김종필 전 총리는 2016년 발간된 그의 증언록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잿빛으로 색칠한 어둠의 신화와 대결했다.

그는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전개를 믿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끝내 밝히지 못한 역사의 진실이 실존한다고 믿었다.

그의 타계는 대한민국 역사의 진실, 그 일단이 영원히 장막 저편으로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의 죽음이 안고 간 숱한 비밀과 의혹은 그 어떤 탁월한 학자에 의해서도 온전히 복원될 수 없을 것이다.

묻혀버린 그 비밀들이 김종필이란 인물의 거대함을 증명한다는 역설 안에서, 우리는 다시 역사와 인간 실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깨닫게 된다.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은 5·16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근대화 밑천이 필요하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 청구권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케다(池田) 일본 총리와 비밀 회동을 하면서 실마리를 풀었다.

JP는 “한일회담은 내겐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였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굴욕외교론이 온 나라를 뒤덮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하야 압력까지 나오자 그는 실권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했다.

JP는 그 때 한국의 현실을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보다 빵을 먹고 자란다. 민주화는 배고픈 사회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빈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JP는 5·16 거사 뒤 박 대통령과 숱한 대화 속에서 한국의 발전 모델이 조국 근대화→민주화→복지화로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나눴다.

이런 ‘선(先)산업화 후(後)민주화’ 발전 전략이 한국을 전후 신흥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으로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고 JP는 확신했다.

박정희와 JP의 그같은 인식은 우리나라 보수 정치철학의 근간을 이뤘다.

그의 생시 증언에는 통념과 속설을 깨는 파격들이 널려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삶과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이다.

혁명의 대의(大義)엔 인간의 아픔이 녹아있고, 철권통치자에게도 권력을 멀리하려는 속성이 있다.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 JP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집권에 이르도록 도와 준 과정은 역사의 순환과 해원(解寃)을 생각케 한다.

한국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난 1997년 DJP후보단일화 때 JP는 김대중 후보에게 “당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박해를 내가 보상해주겠다”며 양보했다.

JP는 대신 DJ로부터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보답으로 받아 역사에서 두 적대 세력의 화해를 추구했다.

김종필의 비극은 끝내 그의 정치 궤적이 박정희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데까지는 나아갔으나, 그 세력이 한국 정치에서 의미 있는 궤적을 남기는 데에는 실패했다.

평생 온갖 종류의 비판에 온 몸을 난타당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거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생사를 초월한 인식의 높은 경지에 이미 도달했음을, 그의 언행은 보여줬다. 평생 그가 지은 업은 그러나 그를 겁박하는 족쇄가 되었다.

그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의 이런저런 불행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여기 남은 사람에게 던지는 그의 메시지는 묵직하다.

"정치는 국민에겐 열매가 될 수 있으나, 정치인에게는 허업에 불과하다"는 그의 발언은 한국 정치사의 가장 빛나는 통찰이다.

허업이란 걸 깨달아야 정치인은 비로소 공인(公人)의 자격을 얻는다. 여기 그가 남긴 귀중한 통찰이 하나 더 있다.

"인생은 길지 않다. 시시하게 살지 마라."

이 한 마디만으로도 그는 오늘 궤멸한 보수세력의 지도자에게 뼈아픈 가르침을 준다. "시시한 정치, 이젠 그만해라!"

JP의 유언처럼 들리는 이 말에 보수세력 부활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렇게 해석해야 JP도, 보수도 부활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무너짐에 대한 착잡한 슬픔이 있다. 떠난 JP도 남은 우리도 숱한 잘잘못을 저지르고 사는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잘 가시오 JP. 시름 모두 내려놓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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