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종섭의 우연이 바꾼 한국정치사]⑲ 김재규의 운명을 바꾼 한마디, “육본으로 갑시다”
[소종섭의 우연이 바꾼 한국정치사]⑲ 김재규의 운명을 바꾼 한마디, “육본으로 갑시다”
  •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국장
  • 승인 2018.07.0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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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한국현대 정치사 최대 사건 중 하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 것이다.

박정희가 자신이 가장 믿었던, 자신이 임명한 최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김재규가 당긴 방아쇠는 역사적으로는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며 추앙하는 것에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유신의 핵심에서,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일선에서 움직였던 조직이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던가. 김재규는 그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군사관학교 동기(2기)로서 누구보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박대통령은 아무에게나 말을 안 놓는데, 김재규에게는 평소 동생처럼 얘기했다. 그를 너무 믿고 귀여워했다. ‘저놈은 야단쳐도 괜찮다’는 식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전까지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야수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라며 자신의 행동이 미리부터 계획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운명의 그날인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뒤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청와대 옆 궁정동 안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5분쯤이었다.

궁정동 안가는 사건 몇 달 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같은 규모의 2층 건물이 세 동 있었다.

각 건물은 20-30m 떨어져 있었다. 남쪽을 향해 오른쪽 건물은 중앙정보부장이 주로 사용했고, 왼쪽과 중간 건물은 대통령 만찬에 주로 이용됐다.

안가 만찬장 사각식탁 안쪽에는 박정희가 혼자 앉았다. 박정희 맞은편에는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가 앉았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왼쪽 측면에 앉았다.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 등 두 여성도 45분쯤 뒤에 동석했다. 동석하는 여성은 차지철이나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선정했다.

기준이 있었는데 약혼자가 있거나 기혼자는 제외했다. 또 비밀 유지 등을 위해 두 번 이상 참석하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만찬 횟수가 늘어나고 참석자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대통령의 여성 문제’는 시중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10.26 당일 안가에서의 대화 분위기는 무거웠다. 부산과 마산에서는 연일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10월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에서 제명된 것을 계기로 불붙은 반유신 데모였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둘러싸고 김재규는 유화책을, 차지철은 강경책을 내놓는 등 진작부터 대립해왔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김계원이 대화 주제를 돌려보는 등 애를 썼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차지철은 “데모는 탱크로 싹 쓸어버리면 됩니다. 데모하는 놈들 몇 명 죽으면 어떻습니까” 하고 큰소리쳤다.

박정희는 “요즘 중정이 약해졌어” 라며 김재규를 나무랐다. 1979년 5월30일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 김영삼 의원직 제명 이후 대처, 데모 사태에 대한 대처 등을 둘러싸고 지적이 잇따랐다.

김재규의 혈압이 서서히 올라갔다. 잠시 밖에 나가 인근 안가에서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와 식사를 하고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만난 김재규는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의전과장을 불렀다.

자신의 집무실 안가에서 가져온 7발이 장전된 권총을 보여주며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모두 죽여!”라고 지시했다. 박선호가 “대통령도 포함됩니까?”라고 물었다. 김재규는 대답했다. “응!”


30분 뒤 “준비됐다”는 보고를 받은 김재규는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따위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하면서 권총으로 차지철을 쏘고 이어 박정희를 쐈다. 7시35분쯤이었다.

팔목을 맞은 차지철은 화장실로 피했고 가슴을 맞은 박대통령은 옆으로 쓰러졌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됐다.

김재규는 방에서 나와 밖에 있던 박선호가 갖고 있던 38구경 5연발 리볼버 권총과 자신의 권총을 바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문갑을 잡고 피하려던 차지철의 복부에 세 발을 발사했다.


뒤이어 맨발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정승화에게 온 김재규는 “총장, 총장, 큰일 났습니다” 하면서 정승화에게 차를 타라고 재촉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정승화에게 김재규는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해 흔들어댔다.

정승화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묻자 “돌아가신 것은 확실하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적이 알면 큰일납니다”라고 강조했다.


승용차가 삼일고가도로를 향하자 조수석에 타고 있던 박흥주가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물었다. 잠시 주저하던 김재규는 “남산(중정 본부)으로 가자”고 답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북한에 대비한 비상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육본으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김재규가 망설이자 앞자리에 앉은 박흥주가 “육본으로 가지요” 하며 방향을 육본으로 정해 8시5분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만약 이때 김재규가 자신의 본거지였던 중정으로 정총장을 데리고 갔다면 그리고 중정 중심으로 상황을 장악했다면 이후 사태는 어떻게 펼쳐졌을까.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육본으로 가자’는 한마디가 김재규의 향후 운명을 좌우한 것은 분명하다.


김재규는 10월27일 0시20분께 체포됐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전두환은 헌병감 김진기 휘하 헌병 특수부대 1개 분대를 차출했다. 압송에 필요한 승용차와 장비는 보안사에서 동원했고, 김재규를 인수해 올 책임자로는 보안처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을 지명했다.

비상국무회의는 그날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으로 정승화를 임명했다.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11월3일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졌다. 11월6일 전두환이 10·26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는 80년 5월20일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불과 나흘 뒤인 5월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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