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86년은 전두환 5공 정권의 말기였다. 전두환 정권은 은밀하게 내각제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신민당 등 야권은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정권 연장을 바라는 세력과 정권 교체를 바라는 세력의 전선은 갈수록 첨예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 흐름도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5월22일 장세동 안기부장은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에게 개헌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이하 전두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향후 5년 동안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고 시도의회만 구성하고 순수 내각책임제로 개헌한다는 것이었다.

6월23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하 노태우)는 “직선제는 나라를 망치고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며 야당인 신민당의 직선제 주장을 비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사 11기 동기로 친구 사이였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정치군인의 대표격이기도 했다.
 
그해 7월7일 청와대에서 당정청 핵심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가 있었다. 노태우 대표, 장세동 안기부장, 박철언 특보, 정순덕 민정당 사무총장, 허문도 정무1수석, 이양우 법제처장, 이해구 안기부 1차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5공 정권의 개헌 방향이 대략 확정됐다. ‘내각제 개헌안을 야당에 제시하되 야당이 거부할 경우 기존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 이후 개헌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부는 강력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내각제를 제시해도 야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호헌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전두환의 이런 입장은 이듬해인 1987년 4.13 호헌 조치로 이어졌다.

반면 신민당은 8월4일 대통령 중심제,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확정했다. 11월5일에는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제로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6.29 부른 격발장치 

12월24일에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정부여당이 민주 제도로서의 의원내각제를 실시할 의사가 있다면 공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국민 앞에 먼저 제시하는 등 실질적인 민주화 조치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해 온 강경론과는 다른 일종의 타협적인 흐름이었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 주도로 1987년 4월9일 신민당에서 75명의 국회의원이 집단 탈당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민우의 신민당은 와해된다. 전두환은 4월13일 이른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현행 헌법에 따라 연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개헌 문제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이었다. 5월1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69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호헌과 개헌 흐름이 맞붙는 가운데 새로운 변수가 터졌다.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경찰은 당초 1987년 1월16일 박종철 사망 사실을 발표할 때는 “조사중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야당의 공세는 거세졌고 민심은 급속히 정권으로부터 이반되기 시작했다. 5월26일 개각이 단행됐다. 노신영 총리, 정호용 내무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이 경질됐다.
 
전두환은 자신이 주장했던 ‘호헌’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헌을 고집하다가는 정권 재창출은커녕 자칫 대통령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직선제 개헌 수용’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고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으로 구체화됐다.  민정당은 6월10일 장충체육관에서 대선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결정했다.

정권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

박철언 전 의원은 자서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6.29 선언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6월23일 연희동에서 노태우 대표가 급히 보자고 했다. 노대표는 ‘(전두환)대통령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더라. 사태 수습을 위해 그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국 타개에 자신감을 잃은 듯하더라.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오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김대중을 사면 복권하고 구속자도 석방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다.”
 
이처럼 노태우의 6.29선언 기획자는 전두환이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당시 야당 분위기로 보아 김영삼 – 김대중 두 사람의 단일화는 어려울 것으로 본 전두환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러했기에 노태우가 마치 전두환과 아무런 상의 없이 6.29 선언을 발표한 것처럼 포장했던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 중심으로 모든 기획을 진행했다. 기획자는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7월1일 6.29선언을 수용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전두환이 처음 ‘직선제 개헌 수용’에 반대했던 노태우를 설득한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다섯 가지였다. 그의 회고를 반추해보자.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굳힌 내가 가장 먼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여당 대통령 후보로서 정국을 돌파해나가야 할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만나 내 생각을 밝히면서 설득을 하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인 6월 17일 노태우 대표를 불렀다. 오전 10시 청와대 집무실에서 나는 마주 앉은 노태우 대표에게 먼저 긴 설명 없이 국민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 직선제 수용을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표는 순간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언지하에 반대한다고 했다. 간선제 선거를 통해 어렵지 않게 당선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선거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을 노 대표에게 나의 지시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노 대표는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로 민정당이 4.13조치에 따라 호헌을 주장해 오다가 당론을 바꿔서 지금까지 내각책임제의 장점을 홍보해 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직선제를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민정당 동지들을 설득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직선제 아래에서 과연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노 대표에게 나는 차근차근 이유를 들어가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첫째, 갈수록 격화되는 소요를 물리적으로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데 5공화국 출범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비상조치를 취한 적이 없지 않은가. 나는 임기 중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끝까지 피하고 싶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 안 되면 선거를 거부하겠다는 야당의 위협이 현실화돼서 실제로 선거를 보이콧하게 되면 단일후보가 되고, 그렇게 해서 당선이 된들 불안한 집권이 된다.

셋째, 야당이 우리의 의표를 찌르듯 현행 간선제를 기습적으로 수용하면서 선전전에 역이용하면 여론이 악화돼서 여당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넷째, 설혹 현행 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한다고 해도 곧바로 다시 개헌 요구가 불거질 것이고 그 결과로 개헌 정국이 지속되거나 새로운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면 국가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다섯째, 직선제로 해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노 대표가 정치적으로 크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서 그것이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직선제 수용 등 획기적인 정치선언을 해서 치고 나가면 급부상할 수 있다. 김영삼, 김대중 누가 나와도 자신이 있다."

나는 6월19일 노 대표를 청와대로 들어오도록 했다. 보안을 위해 청와대 별관으로 오게 했다. 오후 5시 아무도 배석시키지 않은 채 둘이 만났다. 노 대표는 직선제 수용 지시를 따르겠다고 간명하게 결심을 밝히더니 곧 긴장된 표정으로 바뀌면서 "그런데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조치를 건의 드리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의였다. "생각해 보자"면서 일단 노 대표를 돌려보냈다.

노 대표가 제의한 방안은 사실을 왜곡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민을 기만하는 연극을 하자는 것 아닌가. 나는 노 대표의 제의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19일 오후 2시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릴리 미국대사를 접견했다. 레이건의 친서는 내가 4월22일자로 보낸 서신에 대한 회신이었다. 릴리 대사가 "… 군부대가 출동하여 … 없기를 바란다"고 한 데 대해 나는 "그것은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나는 항상 정치문제는 정치적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릴리 대사는 이날 외에도 6.29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두 차례 더 청와대를 방문했다.
 
주말을 넘긴 6월 22일 오전 나는 노 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3일 전에 노 대표가 건의한 데 대해 내 의견을 말해주어야 했다. 나는 노 대표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6월26일 노대표와의 회동은 청와대 본관과 떨어진 별관에서 오후 2시에 이루어졌고 그는 중앙청 서문에서 내가 보낸 청와대 차량으로 바꿔 타고 왔다. 노 대표는 자필로 써서 준비해온 발표문을 낭독한 뒤 공식 발표 이후 자신이 취할 일련의 행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전두환 회고록> 중
 
결국 6.29 선언 이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의 분열이라는 ‘우연’이 현실화함으로써 노태우는 36.6%라는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참고]

전두환 회고록(전두환. 자작나무숲)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박철언. 랜덤하우스중앙)
신현확의 증언(신철식. 매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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