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일 인천문학축구장에서 열린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북한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사진=뉴시스)
2014년 10월 2일 인천문학축구장에서 열린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기에서 북한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있다.(사진=뉴시스)

[뉴시안 이슈추적=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 OCA가 주관하는 아시아경기대회는 1951년 뉴델리에서 시작돼서 이번 2018 자카르타 팔렘방 대회로 18회를 맞는다.

아시아경기대회는 그동안 몇 차례 고비는 있었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과는 달리 지난 67년 동안 17번의 대회를 치르면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개최되어 왔다.

1951년 뉴델린 아시안게임은 11개국 491명의 선수가 출전하는데 그쳤지만, 이제는 45개국 1만여명이 넘는 선수가 출전하는 세계최대의 메가스포츠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면 이제까지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스포츠는 어떻게 성장해 왔었는지 알아보면, 오는 18일부터 16일 동안 벌어질 제18회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즐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승마의 김형칠, 하계 메가스포츠 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

김형칠 선수는 승마에서는 야구의 선동렬, 축구의 차범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설을 쌓아가고 있는 선수였다.

그런데 2006 카타르에서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 때 경기 도중 사망하는 비극을 맞았다.

동계올림픽에서는 루지, 스키 등 워낙 빠른 스피드를 겨뤄야 하는 종목이 있어서 경기(또는 훈련)도중 사망하는 선수가 종종 나오곤 한다.

그러나 하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경기 도중 사망하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김형칠(당시 47살)은 도하 승마클럽에서 열린 2006 도하아시안게임 종합마술 개인. 단체 크로스컨트리 경기 도중 장애물에 걸린 뒤 자신의 애마 '밴더버그 블랙'에 깔려 사망했다.

김 선수는 사고를 당한 직후 곧바로 선수촌 인근의 하마드 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당일 오후 5시20분께 사망했다.

장애물을 넘다 말에서 떨어진 뒤 말이 거꾸러지며 김형칠을 덮쳐 큰 부상을 입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김형칠은 1994년 히로시마 대회부터 도하 대회까지 아시안게임에 4회 연속 출전해 온 당시 한국 승마 대표 팀의 최고 기량을 갖고 있던 최고령 선수였다.

고 김형칠은 서울동작구 국립서울 현충원 충원당에 안치되어 있다.

중공의 등장과 대만의 축출 그리고 이란의 횡포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안게임 ‘흑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중공의 등장으로 중화민국(타이완)이 아시안게임에서 축출되어 참가하지 못했다. 또한 그 대회를 끝으로 이스라엘도 아시안게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아시안게임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메가 스포츠의 꽃인 마라톤이 열리지 못했다. 마라톤은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벌인 전쟁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마라톤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896년 제1회 아테네 대회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고 아시안 게임에서도 1회 뉴델리 대회부터 정직종목이었다.

이란은 당시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시아의 후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란에서 마라톤은 금기로 간주돼 각종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마라톤을 하는 것 자체가 금지돼 있다.

마라톤 제외라는 무리수를 둔 이란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종목에서는 금메달을 추가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보였다.

역도 경기는 인상, 용상, 합계 3가지 세부종목으로 나뉘지만 그 전까지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는 합계만 시상을 했다.

그러니까 1체급에 걸린 금메달은 1개였다.

그런데 이란은 국제종합대회로는 전무후무하게 역도 1체급 당 금메달을 3개로 결정했다. 각 체급별로 인상, 용상, 합계 3개의 기록을 각각 따로 따져 메달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전통적인 역도 강국인 이란이 종합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개최국 프리미엄을 적극적으로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란이 역도에서 한 체급에 3개의 금메달을 배정함으로서 한국팀의 임원으로 출전했었던 황호동(신민당)국회의원이 얼떨결에 역도 수퍼헤비급에 출전해서 인상 2위, 용상 4위(합계 4위)를 기록해 인상에서 은메달을 땄다.

황호동의 아시안게임 메달은 아시안게임 사상 가장 높은 고위층 선수가 획득한 메달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이란은 일본(금메달 74개)에 이어 금메달 36개로 금메달 33개에 그친 중공을 누르고 종합 2위에 올랐다.

중동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 것은 1974년 테헤란 대회 이후 32년 만인 2006년에 카타르에서 열린 카타르 아시안게임이었다.

카타르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의 박태환 선수가 수영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 등 7개의 메달을 따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유남규(탁구)에어 두 번째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스포츠 대국 중공 드디어 아시아 챔피언 등극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처음 등장한 중공이 드디어 아시아 스포츠 최강국 일본의 9연패를 저지하고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일본은 1951년 1회 뉴델리 대회부터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까지 8연패를 했으나, 뉴델리 대회에서 중공에 57대61, 금메달 4개 차이로 패해 2위에 머물렀다. 중공은 이후 2014 인천 아시안게임까지 9연패를 달성 했다.

중공이 종합 1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을 받은 것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마지막이었다.

중공은 개최국 한국이 양궁의 금메달 수를 터무니없이 늘리는(금메달 4개에서 거리별 합계 12개로... 양창훈 4관왕)고, 테니스 유진선 4관왕, 육상 임춘애 3관왕 그리고 복싱에 걸린 12개의 금메달을 모두 차지하는 등의 텃세에 밀려 2위로 떨어질 뻔 했으나 결국 한국을 93대94 금메달 1개 차이로 제치고 종합 1위 2연패를 했다.

한 나라가 복싱 12체급을 모두 석권한 기록은 복싱 뿐 만 아니라 세계스포츠 사에 가장 특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중공(중국)은 2위 권 국가를 금메달 기준으로 최소한 30~110개 이상 차이로 제치고 종합 1위를 독식하고 있다.

또한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는 북한의 서길산 선수가 사격의 개인전 4개 단체전 3개 등 모두 7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단일 대회 최다관왕의 기록을 세웠다.

한 대회 최다관왕이 서길산이라면, 일본의 무로후시 시게노부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그리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해머던지기에서 5연패를 차지한 철인이었다.

그 후 무로후시 시게노부의 아들 무로후시 고지가 1998 방콕 아시안게임,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연패를 해서 무로후시 부자는 아시안게임 7연패를 합작한 용감한 부자(夫子)였다.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한국의 인어 최윤희 선수도 수영 불모지였던 한국에 금메달 3개(개인혼영 200m, 배영 100,200m)를 안겼다.

두 쪽 날 뻔 한 아시안게임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은 인도네시아의 실력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가 중동과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마찰을 우려해 이스라엘 선수단의 입국을 불허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가 중공과 수교를 맺고 있다는 것을 기화로 대만 선수단의 입국도 불허해 더욱 꼬이게 되었다.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 즉 IOC와 국제육상연맹, 국제역도연맹이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출전선수들의 선수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위협을 했으나 인도네시아는 대회를 강행했다.

한편 이스라엘과 대만의 출전을 막은 인도네시아에 항의해 한국, 말레이시아, 이란 등 9개국이 역도 종목에 출전을 하지 않아, 개최국 인도네시아만 남게 되자 결국 역도경기가 취소되었다.

한국은 메달박스 역도와 육상에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아 결국 금메달 4개로 일본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 밀려 종합 6위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국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이후 가장 좋지 않은 성적이었다.

대회 직후 IOC는 인도네시아를 회원 자격을 박탈시켰고, 인도네시아는 이에 반발하여 올림픽에 대항하는 신흥국경기대회를 창설해서 북한 등이 참가한 1회 대회를 개최했지만 이후 흐지부지 되었다.

잇따른 아시안게임 반납 시리즈와 방콕

태국의 방콕은 1966년, 1970년, 1978년 그리고 1998년 등 4번의 아시안게임을 개최해 한국(3번)에 앞서 최다 개최국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 1978년 아시안게임은 억지로 떠안은 대회였다.

1970년 아시안게임은 원래 한국의 서울시가 개최도시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한국(서울)은 당시 북한의 군사 도발 위협 및 경제개발 우선의 이유로 재정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유치권을 반납하였다. 한국은 방콕의 유치 조건으로 벌금 20만 달러를 내야 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조오련이라는 수영 천재가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수영은 일본이 거의 모든 금메달을 독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명이었던 조오련이 자유형 400m와 1500m 2관왕을 차지해 한국의 종합 2위에 결정적이 역할을 했고, 조오련은 이후 1974년 테헤란 대회도 역시 똑같이 두 종목을 제패 했다.

조오련의 아시안게임 2관왕 2연패는 장재근의 1982년 뉴델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육상 200m 2연패와 함께 한국의 아시안게임 사상 가장 뛰어난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원래 싱가포르에서 유치권을 따냈다. 그러나 당시 경제성장에 총력전을 펴던 싱가포르가 재정악화를 이유로 유치권을 반납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가 중공의 자금지원을 받는 대가로 유치권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이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파키스탄이 개최준비를 제대로 못 하게 되었다. 따라서 파키스탄이 또다시 개최권을 반납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그 이후 중동 산유국들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또 다시 방콕에서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사상 처음 아시안게임 2위로 등극한 한국 그리고 김충용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은 한국 스포츠의 신기원을 이룬 대회였다.

그동안의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스포츠 초강국 일본이 당연히 1위를 해오고 있었고, 2위는 개최국이 차지하곤 했고 한국, 인도, 태국 등이 3위 다툼을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1966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이어 개최국 태국을 누르고 종합 2위를 차지했다.

대회 폐막전날 까지 한국은 태국에 은메달은 18대14로 4개 앞섰지만, 금메달(11대12)이 한 개 적어서 일본, 태국에 이어 3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남자탁구 개인전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 탁구는 죽의 장막 속에 있었던 중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세계정상권이었다.

남자탁구 결승전은 세계랭킹 1위 일본의 하세가와와 세계랭킹 10위권에도 들지 못했던 김충용이 맞붙었다. 그런데 기적처럼 김충용이 하세가와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결국 한국이 태국과 금메달 수(12)는 똑같았지만 은메달 수에서 18대14로 앞서 사상 처음 종합 2위에 올랐다.

약물로 얼룩진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레슬링(금메달 10개), 사격(7개), 유도(7개) 그리고 황영조의 남자 마라톤 등에서 금메달을 휩쓸어 금메달 63개로, 59개에 그친 개최국 일본에 앞서 중국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회 종료 직후 중국의 수영 선수 11명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발각되어 금메달5개가 박탈되었다.

그로 인해 일본은 중국이 놓친 금메달 5개를 승계한 반면, 한국은 동메달 2개를 추가하는데 그쳤다.

따라서 한국은 금메달 63개에 머물렀고, 일본은 59개에 5개를 추가해 64개로 종합 2위를 탈환했다. 한국은 자연히 종합 3위로 밀려났다.

그 후 한국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까지 5대회 연속 종합 2위를 차지했고, 이번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 6개 대회 연속 종합 2위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히로시마 약물 사태’가 없었다면 한국이 이번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9연속 종합 2위를 노리는 대회가 되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면서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속해있었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기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등 5개 회원국이 아시아올림픽 평의회(OCA)에 편입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였다.

일부국가가 카자흐스탄 등의 OCA 편입에 반대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시아스포츠 경기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남북이 하나가 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열린 2002 부산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남과 북이 하나 된, 마치 통일의 전초전 같은 흥분된 분위기 였다.

부산 아시안게임 입장식의 절정은 역시 홍콩차이나에 이어 마지막으로 들어온 ‘코리아’였다. 남과 북 선수단은 ‘코리아’라는 팻말과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했다.

‘코리아’가 호명되자 북측 응원단을 비롯한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났고, 이어서 “아리랑”이 흘러 나왔다. 남과 북 선수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입장했으며, 그라운드 가운데에 자리 잡은 합창단원과 관현악단 단원들도 일어서서 환영했다.

남북한 선수들은 회색 바지와 치마를 입었고, 위에는 남색 옷을 입었다. 남북 선수 모두 가슴에 한반도가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이어서 “애국가” 제창이 있자 북측 응원단도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애국가가 끝난 뒤 박수를 치기도 했다.

각각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채화되어 합화된 성화는 한반도 전역을 돌아서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 등장했다.

성화는 2002 한일 월드컵 스타 홍명보 선수가 들고, 유상철 김태영 선수 등이 호위했다. 마지막 성화 주자는 남측 하형주(84년 LA 올림픽 유도 90kg급 금메달)씨와 북측 계순희(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유도 48kg급 금메달) 선수였다.

하형주 계순희 두 사람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 운동장을 돌았고, 북측 응원단 앞에서 손을 번쩍 든 뒤 성화대로 향했다.

그 후 12년이 지나서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때도 남북한 공동 응원단이 구성되어 화제를 모았었다.

호주, 오세아니아 주 아시안게임 편입 실패

호주(뉴질랜드)는 2000년대 초부터 호주(뉴질랜드)의 아시안게임 편입을 호시탐탐 노렸다.

호주의 아시안게임 편입은 정체되어 있는 아시안게임에 활력을 불어 넣고, 중국, 한국, 일본 등이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 메달 판도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17년 9월19일 알 사바 아시아올림픽 평의회 즉 OCA 의장은 "아시안게임이 이미 포화상태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국가가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해 호주의 아시안게임 편입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알 사바 의장은 "아시안게임에 이미 선수와 각 나라 관계자 1만5천 명이 참가하기 때문에 더는 참가 인원을 늘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2017년 2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에 '게스트' 국가로 참가해 아시아 대륙 선수들과 기량을 겨뤘다. 다만, 게스트여서 메달을 딸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존 코츠 호주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호주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2022년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OCA에서 공식으로 반대를 한 셈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에 호주(뉴질랜드)의 편입은 언제든지 논쟁거리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호주가 아시아경기대회 편입을 노리는 가운데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때부터 귀화선수가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때는 카타르가 개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마라톤 강국 케냐 출신의 무바라크 하산 샤미를 귀화시켰다.

당시 카타르 체육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개최국이지만 중국, 일본, 한국 등에 밀려 많은 메달을 따지 못하겠지만, 남자마라톤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큰소리쳤다.

결국 카타르의 케냐 귀화 선수 무바라크 하산 샤미는 기대한 대로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카타르의 스포츠 영웅이 됐다. 그 후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국가들이 마라톤, 1만m, 100m 등 육상 종목에서 아프리카 선수들을 귀화 시켜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지난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100m 금메달도 카타르의 나이지리아 귀화 선수 페미 오구도네(9초93 아시아신기록)선수 였다.

위암 말기에도 불구,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딴 송성일

1994년 히로시아 아시안게임 남자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 대표였던 송성일의 태릉선수촌에서의 별명은‘미스터 겔포스’였다.

당시 유행하던 위장약 겔포스를 너무 자주 복용을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송성일의 평소 체중은 110kg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대회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10kg 정도를 빼서 100kg급으로 출전했다.

그런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겔포스를 복용하는 횟수가 잦았다. 급기야 체중이 저절로 빠져서, 정작 아시안게임 매트 위에 올라갈 때는 한계체중 100kg보다 오히려 2kg이 부족한 98kg이었다.

송성일은 아시안게임 당시 위암 말기여서 체중이 저절로 빠진 것을 모르고 매트 위에 오른 것이다.

송성일은 자신이 위암말기 인 것도 모른 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위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드리겠다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을 해 왔다.

송성일은 자신의 목표대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 그레코로만형 100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위암말기 환자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송성일이 자신이 현대의학으로 극복하기 힘든 중병임을 몰랐었기 때문이었지, 만약 알았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송성일은 아시안게임 직후 금메달의 행복을 누릴 사이도 없이 마치 뱃속을 젓가락으로 휘 젓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 병원을 찾아갔는데, 청천병력 같은 위암말기 판정을 받아야 했다.

송성일은 아시안게임 폐막(1994년 10월16일)이후 불과 3개월 13일 만인 1995년 1월29일, 불과 25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송성일 선수는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장기(안구)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런데 송성일의 불행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위암을 앓던 어머니 이금순 씨가 1년 후에 사망했고, 수년 후에 남동생(송성대)도 역시 위암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 했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