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시안=조현선 기자] 14일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무죄를 선고 받았다.

3월 5일 안 전 지사의 정무비서 김지은 씨가 미투 (me too) 피해를 폭로한 지 162일 여 만이다. 

재판부는 이날 안 전 지사와 김씨 사이의 관계에서 위력이 존재할 개연성을 인정했다. 

도지사 직책을 가지고 공무원을 임면할 권한 등 위력 행사가 가능한 지위와 권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양형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의 성적 제안에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했고 내심 반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에서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것.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의 일이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인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재판부의 입장이다.

김씨는 국민 앞에서 피해를 폭로하던 날 "지사와 나는 합의하는 관계가 아니다" 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성인 피해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고려했다.

재판부는 러시아 출장에서 사건 직후의 피해자가 당시의 상사에게 차마 등을 돌리지 못한 것에 대해 쌍방 간의 합의된 관계임을 증명한다고 판단했다. 

여성이 본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던 것도 강제적인 성관계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증거라고 받아들인다. 

성폭력 피해 재판의 판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순이다.

직장, 학교 등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이는 인간적인 호의는 가해자의 입을 통해 두 사람 간의 쌍방향 연애 감정으로 포장된다. 결국 재판부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가해자의 손을 들어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피해자는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다. 경찰 앞에서, 검찰 앞에서, 방청객을 뒤로 한 채 판사의 앞에서. 피해 사실을 상세하고 일관적인 태도로 피해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가해자를 심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얼마나 증명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선고한다.

‘피해자다움’을 증명해내길 강요하는 법정 앞, 2차 가해마저 피해자의 몫  

안 전 지사의 아내인 민주원 씨가 피고인 측 증인으로 법정에 서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민씨는 법정서 평소 김씨를 두고 돌던 추문들을 들춰냈다. '마누라 비서·상화원 사건' 등 같은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증언은 대중으로 하여금 화살의 방향을 김씨에게 향하도록 돌려놨다. 

안 전 지사에게 발부된 구속 영장은 두 차례 기각되었다. 불기속 수사로 진행된 재판에서 민씨의 증언까지 더해졌다. 3자들이 판단을 내리고 돌을 던졌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피해자 신문 이후 받은 충격으로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2차 피해를 멈춰달라는 자필 편지를 공개했다.  

사법계의 무죄란 죄가 ‘없음’을 증명한 것이 아니다. 죄가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가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나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죄가 증명되지 않았거나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죄’의 개념과는 다르다. 

올 초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투는 페미니즘의 급속한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 전 지사의 정무비서로 일했던 김지은 씨가 TV 뉴스에 나섰던 일은 미투 대열의 최전선에 선 여성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듣는다.

그런 김씨가 법적 다툼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피해자가 재판에 패했다는 사실을 넘어 한국의 페미니즘이 단순히 ‘성 편파 수사 규탄’을 외치는 1차원적인 방식에서 탈피해 더욱 진지하고 정교하게 여성의 인권을 고민하고 쟁취하려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김씨 "피고인 처벌하지 못하면 피고인과 같은 괴물이 또 탄생해 대한민국 갉아 먹을 것" 

구속 심사가 열리던 날 안 전 지사는 국민들 앞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를 향한 사죄는 빠져 있었다. 그런 그가 무죄 선고 후 '다시 태어나겠다'고 밝혔다.

촉발된 미투 운동을 위해,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의 행보를 위해 안 전 지사에게 유죄가 선고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를 위해 안 전 지사가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성 범죄 관련 재판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혔는지가 중점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더 이상 가해자의 시각으로 열리는 재판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재판의 판결문조차 그랬다. 안희정의 언행은 담겨있지 않다. 김씨를 향한 ”안아달라“는 말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다. 김씨의 정상적인 판단력을 요구하면서 김씨가 어떻게 거부했는지, 피해자의 태도에 대해서만 판단한다.

법조계에서도 1심 판결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일반적으로 성범죄에 관한 판결이 뒤집히는 일은 적은 편이나, 가능성은 작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사실오인’든 '법리 해석의 오해’든 기회는 있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이번 재판을 두고 일부 집단에서 '미투'를 위해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의 패배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안 된다. 

이 판결로 하여금 또다른 안희정이 태어나도록 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피해자의 용서 없이, 국민들이 가해자를 용서하게 되는 일을 만들진 않을까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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