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숱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관련된 이들도 많다. 그들은 자신의 시각에서 사안을 보고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말한다. 막후 주역이 자신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각자가 한 역할은 부분에 불과하다. 부분과 부분이 만나고 일부가 일부와 만나면서 어느 순간 전체가 된다. 그러하기에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1990년 1월22일 있었던 ‘3당 합당’도 그랬다.
 
1988년 4월26일 치른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켰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25석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평화민주당은 70석, 통일민주당은 59석, 신민주공화당은 35석을 얻었다. 한겨레민주당이 1석, 무소속이 9석이었다. 299석 중 여당은 과반에 못 미치는 125석 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으로서는 향후 정국 운영에 있어서 험로가 불 보듯 뻔했다. 연합이나 합당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노태우는 총선 다음 날인 4월27일 청와대 회의에서 “연합, 합당을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에 따른 조건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
 
5월12일 통일민주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삼을 다시 총재로 추대했다. 김영삼은 “5공비리 조사에 일해재단도 포함시켜야 한다”라며 ‘5공 청산’을 강하게 주장했다. “7월1일 노태우는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하고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 날인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은 임명동의에 필요한 과반수 148표에서 7표가 모자라 부결됐다. 노태우가 여소야대의 위력을 실감한 첫 사건이었다. 8월22일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김종필과 만났다. 김종필은 보혁구도로 정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대 총선 이후 종이 위에서만 그려졌던 합당은 이때부터 조금씩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노태우는 8월29일에는 김영삼, 8월31일에는 김대중과 만났다. 88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한 협조를 구함과 동시에 조심스레 정계 개편 가능성을 점쳐보기 시작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도 ”정국이 어려운 근본 원인은 여소야대 때문이다. 보수연합을 할 절호 찬스다“라고 노태우에게 조언했다.

9월21일 김영삼의 상도동 집에서 그를 만난 박철언은 보수연합이 될 때 차기 대권의 문이 열릴 수 있다고 넌지시 암시했다. 3당 합당의 그림이 서서히 그려지고 있었다. ‘5공 청산’을 압박하는 야당의 공세가 정국을 이끌었다. 


 
노태우는 12월5일 강영훈 국무총리, 박세직 안기부장 등을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작 정가에서 주목한 것은 김기춘 검찰총장의 임명이었다. 5공 당시 좌천되면서 복귀에 절치부심했던 김기춘의 등장은 향후 5공 청산과 관련해 피바람이 불 것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문화공보부장관에 임명된 최병렬 전 정무수석, 한영석 민정수석은 김기춘의 서울법대 1년 선배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5,6공 단절론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989년 1월12일 5공 실세였던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됐다. 1월27일에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구속됐다.
 
1988년 12월 말에 노태우-김영삼 간에는 이미 상당한 물밑 라인이 가동되고 있었다. ‘합당’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보혁구도로의 정계 재편’과 관련한 정보 탐색전이자 이심전심의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민정당-신민주공화당 합당에 더해 통일민주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물밑 작업들이었다.

홍성철 비서실장 라인(김영삼 측 황병태 의원과 주로 만남),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 라인, 김창근 교통부장관 라인, 이동진 의원 라인, 유혁인 전 정무수석 라인(김영삼 측 김덕룡 의원고 주로 만남) 등 야권과 나름 인맥이 있는 라인이 총가동되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도 역할을 했다. 신현확의 아들 신철식 전 국무조정실 차장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라인이 가동됐다. 대학 때 같이 지냈던 오촌당숙의 친구가 김현철의 측근인 김기섭 전 국정원 1차장이어서 김현철까지 연결된 것이다. 신철식과 김현철이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초였다.

또 하나 중요하게 가동됐던 라인이 신격호 라인이었다. 노태우는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에게 신격호 라인 가동을 지시했다. 노태우는 ”신격호와 YS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이다. 자금 지원도 상당히 해주고 있는 듯하고 두 사람 사이는 깊은 대화를 나눈다. 신격호는 믿을 수 있는 기업가이다. 자주 만나 올바른 정보도 파악하고 YS에게 합당을 권유하도록 부탁도 하라“라고 지시했다.

박철언은 자서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신격호는 나라 걱정, 경제 걱정을 많이 하면서 모두를 위해 정계 개편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YS의 마음을 합당으로 돌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증언했다. 7월18일 저녁 롯데호텔 34층 일식당 만남 같은 식이었다.

이때 박철언은 신격호를 만났다. 신격호는 당시 ”YS의 합당 의사는 분명하다. 그런데 전제로 정호용 이원조의 용퇴를 주장하고 있다“라는 등의 말을 했다. 그 며칠 전 신격호는 김영삼과 같은 장소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김영삼-신격호, 신격호-박철언의 만남은 이날 외에도 11월28일, 12월12일이 있었다.
 
1989년 3월7일 노태우는 청와대에서 김종필을 만났다. 3시간 독대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필은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을 제의했다. ”공화당 35명이 민정당과 합치면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북방외교를 포함한 국방 외교 정책을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합칩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결심입니다“라고 말했다.

노태우는 김종필의 손을 잡으며 ”좋습니다. 곧 합시다“라고 답했다. 이후 홍성칠 비서실장과 김용환 정책위의장 라인이 가동됐다. 김종필은 곧 합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김영삼과의 합당까지 생각한 노태우는 시간을 끌었다. 3월16일 상도동 자신의 집 2층 서재에서 박철언과 만난 김영삼은 합당에 대해 동의하는 뜻을 밝혔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구국적 차원에서 양당 합당을 하기로 합의한다“는 원칙적 합의를 한 것이다. 3당 합당이 공개된 것은 1990년 1월 22일이었으나 사실상 9개월 전인 1989년 3월 물밑에서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사이에 큰 틀의 합의가 있었다.

노태우는 분위기 조성에도 신경을 썼다. 5월30일 상도동에 있던 김현철의 아파트에서 김영삼과 만난 박철언은 6월에 소련을 방문하는 YS에게 20억 원과 여비조로 2만 달러를 전달했다. 김영삼은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앞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혁명적인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박철언은 1989년 연말 김현철씨 아파트에서 10억 원, 1990년 3당 합당 직후 설 연휴를 앞두고 상도동 김영삼 총재 자택에서 다시 10억 원을 전달했다.
 
1989년 7월10일 노태우와 김종필은 다시 만났다. 오찬을 같이하며 양당 통합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나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김영삼과 김종필은 10월2일 안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노태우를 향해 벌인 일종의 시위였다. 합당이 빨리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두 사람은 10월31일 두 번째 골프 회동을 하며 노태우를 압박했다.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과 각각 합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했다. 이때쯤에는 박철언 박준병 – 황병태 김덕룡의 통일민주당 라인과 홍성철 이춘구 – 김용환의 신민주공화당 라인이 가동되고 있었다.

노태우는 12월 말까지도 민주자유당, 민주화합당, 우리민주당, 통일한국당 네 가지 중에 당명을 정하기로 하고 논의를 진행했다. 원래는 1990년 1월5일 합당 선언을 할 계획이었다.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연말에 ”양당 체제로 정계를 개편하고 그 과정에서 민정당을 해체할 수 있다“고 발언한 후폭풍으로 대표직을 사임했다. 1990년 1월6일 김영삼과 김종필은 다시 한 번 골프 회동을 했다. 두 사람은 1월15일에도 회동했다.
 

노태우는 1월11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12일에는 김영삼과, 13일에는 김종필과 만나면서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김대중은 합당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김종필은 합당 전날인 1월21일에서야 김영삼까지 포괄하는 ‘3당 합당’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한 날 한시에 같이 합당을 하는 줄은 몰랐다.

김종필은 불쾌했지만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다. 1990년 1월22일 오전 10시,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청와대에서 만났다. 마지막 고비는 지도체제 문제였다. 애초에 전당대회 뒤에 ‘노태우 총재-김영삼 대표최고위원-김종필 최고위원’ 체제로 합의했으나 김영삼은 ‘노태우 명예총재–김영삼 총재-김종필 최고위원’을 고집했다.

노태우와 김영삼의 언쟁이 이어졌다. 분위기를 정리한 것은 김종필의 한마디였다. ”다음 시대의 주연은 김영삼 총재이실테니 나는 그렇게 알고 돕겠습니다. 저는 조연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겠습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은 저녁 7시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김종필의 말마따나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인다)를 넘어 진천동지(震天動地.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린다)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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