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뉴시안=김성수 편집 자문위원/시사문화평론가] 2018년은 그야말로 격변의 한 해였다.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표현하고 실천했고, 사회 곳곳에서 뜨거운 논쟁과 다양한 담론들이 형성되었다.

무너져버린 국가 시스템을 복원하려는 행정적, 사법적, 입법적인 노력들은 아직도 거대한 기득권 세력들의 반동에 부대끼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이미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확고한 시스템과 뚜렷한 성과들로 정립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인식의 물줄기는 이미 바뀌었으며 이는 발 빠르게 시대정신을 따르는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들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죄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올해 가장 성공한 대중문화 콘텐츠 중 하나는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다.

1편 <죄와 벌>이 작년 말에 개봉해서 올해 초까지 무려 1440만을 돌파했고, <인과 연>은 여름 시즌에 개봉해1227만을 넘어섰다. 화려한 CG로 구현한 지옥의 비주얼과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는 이 작품의 오락성을 극대화시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쌍천만의 기록을 세우도록 한 실체적 힘은 바로 작품의 메시지였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란 무엇이고, 어떻게 ‘용서’받아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1편에서는 벌을 받아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했고, 2편에서는 그 죄의 원인에 대해 탐구하여 나름대로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 '신과함께2-인과연'의 해외 프로모션 모습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신과함께2-인과연'의 해외 프로모션 모습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죄’란, ‘약자’를 품지 못하는 이기적 행동에서 비롯되고, ‘화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용서’받음으로 가능해 진다는 이 영화의 결론은, 국정농단 사태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파렴치한들과 대조되면서 관객들의 마음에 선명한 기준을 남겨 주었다.   

이 영화처럼, 2016년 말에서부터 강력히 요구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 즉 ‘적폐청산’과 맞물리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 콘텐츠들이 올해 특히 사랑을 받았다.

이들은 대개는 근현대사에서 소재를 찾아 우리들에게 파사현정의 각성을 안겨주었는데, 올해 들어서만 500만을 넘게 동원한 영화 <1987>이나, 남북화해무드와 함께 사랑받은 <공작>, IMF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헬조선의 기원을 탐구한 <국가부도의 날> 등이 이런 콘텐츠들이었다.

드라마 부문에선 <미스터 선샤인>이 같은 흐름 속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다. 초기의 고증 논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알레고리를 활용한 특화된 스토리텔링을 이끈 제작진들은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폄하되었던 구한말 의병들의 활동과 이후 독립운동과의 연결 고리를 흥미롭게 포착해 내었다.   

82년생 김지영 책 표지 (사진=뉴시스)
82년생 김지영 책 표지 (사진=뉴시스)

미투 열풍과 여성들의 전진  
올해 가장 드라마틱한 의식적 변화를 이끈 활동은 누가 뭐래도 미투 운동이었다.

사회적으로 은폐되던 성범죄의 심각성은 2016년 10월부터 SNS를 중심으로 활발히 폭로되기 시작했다.  

웹툰 등 서브컬처 문화 내부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 달기 운동에서 시작된 이 움직임들은 문단, 교육계, 문화계, 연극계, 영화계, 직장, 학교, 교회, 대학 등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문학계를 포함한 예술계 전반의 성폭력 피해는 미국의 미투 운동과 더불어 2017년을 불태우는 핫이슈로 부각하더니, 급기야 올해 서지현 검사의 JTBC 뉴스룸 인터뷰를 통해 폭발했다. 

이에 발맞춰서 여성으로 길러지면서 입는 피해들을 담은 콘텐츠들이 적극적으로 소비되었고, 용기있게 사회에 도전하는 긍정적 여성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백만부를 돌파하고 <허스토리>, <미쓰백>, <마녀> 등의 영화나 <SKY 캐슬>, <땐뽀걸즈>, <미스터 선샤인>,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미스티> 등의 드라마들이 쏟아진 것은 바로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페미니스트 필독서로 규정된 <82년생 김지영>은 82년생이라는 세대 구획과 김지영이란 평범한 여자 이름을 통해서 오늘의 30대 여성들의 위기를 제대로 진단해 내었다.

88년 올림픽을 겪으면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92년의 대중문화 빅뱅 시대를 만끽했던 취향과 개성의 세대. 하지만 그들은 사춘기 때 IMF를 겪고 사회 진출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과거보다 미래가 더 어려워진 첫 세대가 자신들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김지영이란 이름은 동시대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데 이는 다수의 여성이 겪는 이중의 좌절을 상징한다.

아직 바뀌지 않은 가부장적 질서와 사회적 시스템 덕에 경력 단절과 독박 육아, 가부장 전통의 강요 등에 시달리는 그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아이를 낳는 행복을 반납하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 하소연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것이 사상 첫 여성들만의 시위, 혜화역 시위가 된 것이다.

파파미의 공감 리더십
하지만 이렇게 진취적이고 전투적인 여성들이 각광받은 것과는 달리 사회가 원하는 리더십에 대한 탐구는 한마디로 파파미, 즉 공감하고 소통하는 리더십이었다. 

올해의 인물 1위로 선정된 문재인 대통령과 2위로 선정된 박항서 감독을 보라.

이들은 모두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낮은 자세로 소통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리더들이다. 5.18로 아버지를 잃은 유족을 포옹해주는 문대통령의 모습이나 선수들의 발을 마사지해 주고 부상선수에게 비즈니스석을 양보하는 박항서 감독의 모습은 바로 이런 파파미의 대표적 사례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이런 모습이 돋보였던 작품이 영화 <안시성>이었다.

늦봄 문익환 선생을 떠올리게 했던 전설적 장수 양만춘은 조인성에 의해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미소가 아름다운 리더로 되살아났다. 추석 대목에 맞붙은 대작들 중에 안시성만이 유일하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880만을 넘어 천만을 향해 가고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엄청난 성공은 이 리더십의 탐구와 궤를 같이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 혈통의 잔지바르 태생으로 뭄바이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영국에 정착한 철저히 이방인(보헤미안)이다. 그는 파씨교도인데다 성소수자이기도 했기에 3중으로 소수자였던 인물이다. My Melancholy Blues라는 곡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정체성은 곧 고독의 다른 말이었고,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낙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부적응자들을 위해 계속 살았고, 계속 음악을 만들었다.

더불어 부적응자들로 남아있길 원했던 퀸의 다른 멤버들 역시 프레디와 함께 있길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 진주처럼 잉태한 곡들은 그만큼 거대한 호소력으로 팬들에게 다가갔고, 특히 무대에서 끊임없이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몸짓들은 관객들에게 위로와 치유, 용기와 자존감을 선사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성공은 바로 우리 사회가 어떤 리더를 원하는지를 입증해 준 사례였던 것이다.

사실 방탄소년단의 엄청난 성공 역시 이 흐름 속에서 분석될 수 있다.

애초에 K-POP의 3대 메이저 회사가 배출하지 않은, 그래서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던 그들은, 자신들만의 음악과 메시지를 알아줄 사람들을 찾아 SOS를 보냈고, SNS와 유투브를 타고 퍼져나간 동영상들과 음악들이 ‘아미’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아미들이 그들을 사랑했던 것은 처음부터 신적 존재가 아니었던 그들이 자신들과 더불어 성장하면서 진정한 ‘아이돌’이 되어 갔기 때문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공감과 소통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팬덤을 ‘돈 바치는 노예’ 쯤으로 알고 수직적으로 대하는 다른 기획사들과는 근본 철학이 달랐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작품들은 드라마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는데 <나의 아저씨>나 <쌈 마이웨이>, <김비서가 왜 그럴까?> 등의 성공 역시 같은 흐름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소확행을 반영한 콘텐츠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런 기조는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드러졌다. <윤식당>, <효리네 민박>, <숲 속의 작은집>, <두발 라이프>, <비긴 어게인> 등, 이 계열의 예능들이 관찰 카메라와 함께 한 해를 휩쓸었다.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곰돌이 푸 -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하마터먼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등의 위로와 공감을 주제로 하는 에세이들이 강세를 보였으며,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소공녀>, <곰돌이 푸> 등과 드라마 <나의 아저씨>, <땐뽀걸즈>, <백일의 낭군님>도 이 계열의 콘텐츠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만큼 2018년의 청춘들은 잘못 고안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 때문에 하루하루 버티는 데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늘을 버티는 데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한 장면 (사진=뉴시스)

따라서 2019년에는 무엇보다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나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이 확실히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증거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입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제대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리더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줄 수 있는 행정적 변화도 필요하다.

이런 변화들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가장 중요한 변화들을 먼저 챙겨나가면서 하나씩 바꿔나갈 것이다.

그런 변화는 최소한 지금처럼 침대 축구나 뻥 축구를 하면서 여전히 대표선수로 필드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들을 경기장 밖으로 몰아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 옆에서 들러리를 서는 스피커들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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