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마사대부심사 부정 등 한국마사회의 부조리한 운영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숨진 고(故) 문중원 기수 유가족과 동료 등이 16일 오전 서울 견지동 조계사 극락전에서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49재를 마친 뒤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2020.01.16. chocrystal@newsis.com
마사대부심사 부정 등 한국마사회의 부조리한 운영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숨진 고(故) 문중원 기수 유가족과 동료 등이 16일 오전 서울 견지동 조계사 극락전에서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49재를 마친 뒤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시안=조현선 기자]합의안을 도출하며 일단락 되는 듯 싶던 고(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대책위)와 한국마사회 간의 갈등이 다시 점화됐다. 마사회가 영결식을 코앞에 두고 돌연 합의안 공증을 무기로 내세웠다. 준비된 장례 일정은 다시 중단됐다. 고인이 한국마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이후 102일 만이다. 

9일 오후 문 기수 대책위에 따르면 마사회 부산경남경마본부에서 이날 약속된 합의안 공증을 돌연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책위와 장례위원회 참석 인원들은 영결식을 연기하고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본부에서 본부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대책위는 "이날 정오께 합의안 공증을 위해 만났으나 마사회가 합의를 어기고, 공증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장례 일정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마사회 측인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본부장은 대책위가 계속 적폐 청산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한 것을 문제 삼고 공증을 거부했다.

이들은 ▲공공운수노조 홈페이지에 게시된 입장문을 게재 철회할 것 ▲게재 철회가 어렵다면 추후 부산에서 투쟁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평화선언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며 녹취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위가 합의 직후 발표한 입장문 중 "한국마사회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영결식장에 게시된 '마사회 적폐'라는 문구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일단 합의하는 척 여론을 잠재운 뒤, 영결식 직전에 유가족의 생계를 손에 쥔 채 합의를 파기하는 것이 아니냐. 갑질은 언제까지 이어갈 것이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故) 문중원 기수는 지난해 11월 29일 부산경마공원 기숙사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당시 마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말을 대충 타라는 등 부당한 지시 때문에 기수로서 한계를 느꼈고, 이에 조교사가 되고자 면허를 취득했지만 마방(馬房·마구간)을 받지 못했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겼다.

이후 유족 등은 마사회를 대상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등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여왔다. 하지만 마사회는 무응답으로 일관해 왔다는 게 유가족 측의 입장이다.

당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노조)는 한국마사회(마사회)가 진상규명과 제도개선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무성의한 태도를 규탄했다. 

노조는 "고(故) 문중원 열사는 '선진 경마'라는 미명 하에 강요된 경쟁체계 속에서 조교사의 부정지시, 마사대부 심사 과정의 비리를 감내해야 했다"며 "이 죽음은 마사회의 경쟁체계가 만들어낸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또 "마사회는 경마시행처로서 조교사, 기수, 마필관리사에 대한 부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며, "그러나 고인의 죽음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 2005년 개장된 마사회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는 그동안 기수, 마필관리사 등 7명이 극단적 선택을 내렸다. 문 기수가 8번째 희생자가 된 셈이다.

아울러 마사회는 문 기수의 사망 당일 열리지 못했던 경주를 추후 '보전 경마' 형태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문제가 됐다. 유가족의 큰 반발을 샀고, 일정은 취소됐다. 숨진 기수의 장례를 보름 넘게 치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사과 한 마디 없이 당장 사업 손해부터 메꾸겠다는 것이다. 

당시 유족들은 "고인 죽음에 책임이 있는 마사회가 사태 해결의 노력은 과소하고, 유가족 뜻에 반하는 보전경주를 강행하는 것은 유족에 대한 우롱"이라며, "최소한의 진상규명과 사죄 없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 마사회의 결정에 크게 분노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90여 일이 지난 이달 6일, 미온적인 태도만을 유지하던 마사회가 애도 표명과 재발 방지안을 약속했다. 유가족은 그제서야 미뤘던 장례를 치뤘다. 문 기수가 숨진 지 99일째 되던 날이다. 

합의안에 따르면 마사회는 3개월 이내에 부산경남 경마 시스템의 배경과 현황을 분석하는 연구용역사업을 추진하고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또 기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실행 가능한 제도 개선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앞서 시민대책위는 문 기수를 포함한 다수의 관계자를 죽음까지 몰고 간 마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밝혀내기 위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줄곧 요구해 왔다.

마사회는 90여 일이 지나고서야 울며 겨자먹기로 답을 내놨다. 이후 '문 기수 사망 사고 책임자가 밝혀질 경우' 형사책임과 별도로 마사회 인사위원회 등에 면직 등 중징계를 부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상 대책위의 진상 규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마사회는 합의가 이뤄지던 날까지도 기수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적폐를 은폐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수들이 낸 노조설립신고서는 아직도 고용노동부 손에 들려만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시민대책위는 문 기수의 사망 후 100일이 지나기 전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합의안을 수용했다는 입장이다.  

이날 대책위는 '마사회 적폐 권력 해체를 위한 대책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앞으로도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을 지속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마사회는 이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다려 온 합의안은 사실상 파기됐다. 현재 영결식 직후 장지로 향할 예정이던 운구차는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본부 앞에서 무기한 대기중이다. 문 기수를 죽음까지 몰고 갔던 마사회의 ‘갑질’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