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
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 (사진=뉴시스)

[뉴시안=조현선 기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이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6년 간 투병해 왔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故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후 회사의 방향성을 전자산업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한국의 삼성'이 아닌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부산사법부속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53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65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고인은 같은 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했다.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의 별세 이후 경영권을 승계 받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고인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시기는 1966년 9월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해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서는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 전자 산업 중심 기업으로 키웠다.

이 회장은 1974년 주위의 반대를 뒤로 하고 파산 직전의 한국 반도체 기업을 인수했다. 당시 국내에서 반도체 사업이란 불모지나 다름 없었으나, 그는 달랐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고, 한국과 세계경제의 미래에 필수적인 산업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반도체 사업에 몰입하며 과감하게 투자하고 끊임없이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84년 64메가 D램을 개발했다. 1992년부터는 20년간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속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올해 3분기 기준 삼성전자는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46.1%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회장은 '신경영'을 내세우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지난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열린 선언식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슬로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질적 성장에 대한 위기 의식이 신경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신경영을 시작으로 삼성그룹이 글로벌 시장의 무명 기업에서 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는 평이 나온다.

신경영으로 새로 거듭난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애니콜 첫 제품인 'SH-770'을 시작으로 휴대전화 시장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인은 휴대전화와 관련해 품질 경영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지난 1995년 구미 운동장에서 500억원 상당의 불량 제품을 모두 회수해 소각을 지시했던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같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995년 8월 삼성의 애니콜이 당시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 1위를 차지하던 모토로라를 제쳤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 51.5%를 기록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2012년 CES 2012 참관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후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 사업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글로벌 무대에선 다소 뒤처지던 삼성전자를 명실상부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진은 2012년 CES 2012 참관 사진.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은 금융계열 구축에도 힘썼다. 삼성그룹은 1988년 3월 삼성신용카드·동성투자자문을 설립했다. 1991년 11월 국제증권을 인수했으며, 현재의 삼성증권이 됐다. 1993년에는 삼성파이넌스와 삼성JP모건투자신탁을 세우면서 보험·증권·카드 등 금융 전반을 아우르게 됐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경영 능력이 2002년 부터 빛을 발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2002년 처음으로 세계 전자 업계를 주름 잡았던 소니를 넘어서면서 글로벌 시장 내에서 삼성의 입지는 크게 변했다. 

당시 비즈니스위크,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포춘, 타임지 등은 특별호를 꾸려 글로벌 기업으로 급부상한 삼성의 성공 비결을 앞다퉈 분석해 내놓으면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주 요인으로 꼽았다. 

이는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1위의 영광을 내기 시작한 시기와도 맞물린다. 이 회장은 반도체 관련 기술 등을 강조하면서 당시 1위 기업인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한 채 독자적인 낸드플래시 개발을 고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5년에는 '창조 경영'을 내세우며 신사업 개척을 강조했다. 이후 삼성그룹은 신수종사업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바이오, 나노, 로봇 등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지난 2008년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 특검'이 꾸려진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특검 조사 이후 삼성그룹은 수뇌부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차명계좌 실명 전환 등의 내용이 담긴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2010년 3월 경영을 재개했다. 당시 미국에서 애플의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변화하는 패러다임의 흐름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의 2010년은 휴대전화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확고히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해가 됐다.

2012년 7월에는 삼성전자의 액정디스플레이(LCD) 사업부와 자회사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등을 합병해 삼성디스플레이로 이름을 바꿨다.현재 삼성디스플레이는 글로벌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독점에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지속적인 시도를 통해 갤럭시 브랜드를 만들어 낸 것도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애플이 독점하고 있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갤럭시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면서 현재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 업체가 됐다. 이때 시장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모토로라, 노키아 등은 옛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스마트폰 등 삼성이 안정적인 주 수익을 내고 있는 기틀은 이 회장 시기에 구축됐다는 평가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당시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10조원에 불과했으나 약 31년 만인 2018년 387조원으로 약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원으로 뛰면서 396배 급증했다. 

생전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던 이 회장은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아 레슬링을 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성장시켰다.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구단주를 지내기도 했다. 라이온즈는 이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KBO리그 명문 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돼 국제 스포츠로 무대를 넓혔다. 이후 21년 동안 한국 스포츠는 물론 세계 스포츠 발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부터 2011년 남아공 더반 IOC 총회까지, 1년 6개월 동안 170일간의 해외 출장을 다니며 다른 국가의 IOC 위원들을 만나 평창 지지를 호소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꼽힌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도 이 회장의 지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2017년 8월 IOC 위원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IOC는 같은해 9월 이 회장을 명예위원으로 추대했다.

한편 이 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조화와 조문도 정중히 사양한다는 방침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을 있다.

삼성전자 측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께서 2020년 10월 25일 별세했다"며,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키워드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