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3월 15일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 (가운데)와 버지니아대 학생이었던 에드워드 (왼쪽), 상원 법률고문 로버트 (오른쪽) 형제가 워싱턴의 한 만찬장에서 찍은 사진. (사진=뉴시스)
1958년 3월 15일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 (가운데)와 버지니아대 학생이었던 에드워드 (왼쪽), 상원 법률고문 로버트 (오른쪽) 형제가 워싱턴의 한 만찬장에서 찍은 사진. (사진=뉴시스)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은 힘이 세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 만 명의 유태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 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 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되었고,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기도 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 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었고, 그래서 그 나라의 스포츠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미국 역사를 바꿔놓은 케네디 암살사건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텍사스주 댈러스 사내를 카퍼레이드 하던 미국의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리 하비 오스월드가 쏜 총에 의해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오스월드는 보관창고 건물 6층에서 총알 3발을 발사했는데, 그 중 한발이 케네디의 목을 관통했고,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케네디가 죽고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11월 24일 아침, 오스월드는 텍사스 경찰서 지하에서 주 교도소로 이동되던 도중 잭 루비라는 나이트클럽 경영자의 총에 암살되었다.

1865년 4월15일 에이브러햄 링컨 16대 미국대통령이 암살당한 사건이 19세기 최대 암살사건이라면, 케네디 암살 사건은 20세기 최대 암살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짧았지만 굵었었던 재임 기간 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임기를 시작, 63년 암살될 때까지 겨우 2년 동안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있었지만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케네디가 1917년 미국 최고 명문가 집안에서 고생 없이 자라서 어떻게 그 험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라고 우려했었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구소련과의 우주전쟁을 잘 수행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었다고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가장 확고한 스포츠 관을 갖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연약한 미국인’이라는 기고문에서 미국의 스포츠가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있다.

그는 모 신문사에 기고한 기고문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부처는 체육진흥과 체력증진이 미국의 기본적이고 일관된 정책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국가건설에 있어서 정신적, 지적, 자질에 건강과 신체적 활력이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미국 역사가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고 했다.

짧은 재임 시절에도 확실한 체육 정책 실행

그는 재임 시절 실제로 미국인들의 건강을 위하는 체육 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또한 케네디는 실제로 야구, 미식축구, 농구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야구에서는 ‘케네디 스코어’가 가장 재미있는 경기의 양 팀 점수라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케네디 대통령이 얼마나 야구에 조예가 깊은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뷰 끝에 질문을 던졌다.

“MR, 케네디! 야구는 9회까지 하는 스포츠인데, 가장 재미있는 야구 게임은 어떤 경기인가요?”

“아! 야구는 물론 박빙의 투수전도 볼 만 하지만 타격 전이 더 재미있어요 두 팀이 어느 정도 점수가 나야 해요”

“그러면 어느 정도의 타격 전이어야 가장 재미있을까요?” “흠...네~ 두 팀 합해서 3~4개의 홈런이 나오면서 15점 정도 점수가 나는 난타전이라면 가장 재미있을 것 같군요, 두 팀의 점수 차가 너무 많이 나도 곤란하고 한 점 차 승부면 더 좋구요”

“그럼 7대8 정도네요”

“그래요 8대7 정말 재미있는 스코어죠”

케네디 스코어는 두 팀 합계 15점에서 나와

케네디는 두 팀 합해서 15점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기자가 8대7 또는 7대8이라고 말했고, 케네디는 그 정도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한편, 케네디의 내기 골프는 당시 ‘대통령 가’에 잘 알려졌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재임 시절 절친한 친구인 크리스 던피 씨와 홀당 10달러 내기를 했다.

그리고 첫 번째 홀에서 케네디가 파를 세이브하기 위해서는 약 90㎝ 퍼트를 성공시켜야 했다.

케네디는 점잖게 컨시드(Concede) 즉 기브(일명 OK)를 기다렸으나 친구는 못 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정도는 봐줘야 되는 거 아냐?”

“야! 그 정도는 직접 집어넣어야 내공이 쌓이고 그러는 거야”

케네디는 그 퍼트를 조준하면서도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크리스 던피에게 또다시 사정을 했다.

“야~ 나 오늘 오후 5시 30분에 국세청장과 약속이 있어 오늘 라운드는 일찍 끝내야 돼”

던피는 그제 서야 마지못해 기브를 인정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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