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연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랑한 '엘리트 스포츠'
[2021 연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랑한 '엘리트 스포츠'
  • 기영노 편집위원
  • 승인 2021.05.04 1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한국 엘리트 스포츠 기반을 다지다
민관식씨 의견 듣고 태능 선수촌 만들어
체육연금, 국민 체력 향상에 기인
1965년 5월 박 전 대통령이 동승한 핸드 전 의전장과 함께 미국이 제공한 미 대통령전용기를 타고 방미하는 기내에서 故 육영수 여사가 당시에는 신기술이었던 위성전화를 통해 서울에 있던 영애(박근혜 대통령)와  통화하는 사진.  (사진=청와대 /뉴시스)
1965년 5월 박 전 대통령이 미국이 제공한 미 대통령전용기를 타고, 동승한 백안관 핸드 전 의전장과 함께 방미하는 기내에서, 故 육영수 여사가 당시에는 신기술이었던 위성전화를 통해 서울에 있던 영애(박근혜 대통령)와 통화하는 사진. (사진=청와대 /뉴시스)

[뉴시안=기영노편집위원] 대통령들의 힘은 그 나라의 체육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 여 만명의 유태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 여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 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뚱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수상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되었고,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기도 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 화 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었고, 그래서 그 나라의 스포츠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한국 체육대학 설립 지시

한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에 출전한 이후 번번이 금메달 획득에 실패 했었다. 그래서 양정모 선수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국민들이 느꼈던 감격은 건국이후 최고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김성집, 한수안 선수가 역도와 복싱에서 동메달 2개를 땄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김성집, 강준호 선수가 역시 동메달 2개를 따는데 그치고 말았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송순천 선수가 아시아 선수 최초로 복싱에서 은메달을 따고, 김창희 선수는 역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역시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출전사상 유일하게 노메달에 그쳤고, 이웃 나라에서 벌어진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복싱의 정신조 레슬링의 장창선이 각각 은메달, 유도의 김의태가 동메달 1개를 따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는데 그쳐 역시 금메달 사냥에 실패 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는 복싱에서만 2개의 메달, 지용주(은메달) 장규철(동메달)을 따는데그쳤었고,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유도에서 오승립 선수가 은메달 1개를 따는데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자유형 레슬링 페더급에서 양정모 선수가 딴 금메달은 그야말로 7전8기(七顚八起)에 성공한 금메달이 였기에 그 감격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양정모 선수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꽃눈을 맞으며 금메달 퍼레이드를 한 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벌인 환영행사에 참석 했다.

박 대통령은 “양 선수 수고 했어요, 그런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도 양 선수의 뒤를 이어서 금메달리스트가 계속해서 나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그 때 양 선수 일행 가운데 정동구 코치가 대답했다.

“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나라에서는 운동선수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체육학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소질 있는 선수를 어릴 때부터 키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 대통령은 양 선수 일행의 말을 들은 뒤 즉시 체육전문학교 설립을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박 대통령이 양 선수와 정 코치 등을 접견한 것이 8월 초였는데, 그로부터 불과 4개월 만인 12월14일 문교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체육대학 설립계획을 마련하고, 그 과정에서 2년제 전문대학이 아닌 4년제 정규대학을 설치하는 실행 안을 작성해 대통령의 지시가 있은 지 불과 4개월 만에 국립체육대학(현 한국체육대학교)을 탄생 시켰다.

정부는 1976년 12월30일 ‘한국체육대학 설치 령’을 공포하였고, 곧바로 시행되어 1977년 3월7일 국내 최초로 국립체육대학이 설립되었다. 정원은 120명이었고, 초대 학장은 당시 한양대학교 체육대학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유근식 박사였다.

한국 채육대학은 3년 후인 1980년 부설기관으로 체육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스포츠과학 분야의 학문적 기반확충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한국체육대학 출신이 올림픽 금메달 비중은 하계올림픽 30퍼센트 이상, 동메달 올림픽은 20퍼센트 이상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까지 한국이 획득한 동, 하계 올림픽 금메달 가운데 약 25퍼센트인 25개 이상이 한국체육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생이 따낸 것이다.

이 같이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출신 답게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현재 대한민국 스포츠가 세계 10강안에 드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동안의 재임기간 동안 기반을 다져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82년 3월 당시  태능선수촌 운동장에서 열린 인조잔디 기공식, 이는 국내 최초의 인조잔디 였다
1982년 3월 당시 태능선수촌 운동장에서 열린 인조잔디 기공식, 이는 국내 최초의 인조잔디 였다 (사진=대한체육회DB)

 

민관식 씨 의견 받아들여 태릉선수촌 설립

앞서 언급을 한 것처럼 스포츠의 산실인 한국 체육대학을 만들도록 했고, 국가대표의 훈련요람인 태릉선수촌은 박 대통령과 대한체육회장 이었던 민관식 씨의 합작품이었다.

민관식 회장은 1965년 어느 날 꿈에 “국가대표 선수들을 훈련시킬 선수촌을 지으려면 태릉으로 가보라”는 계시를 받고 박대통령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다.

만약 그가 “민 회장 거 개 꿈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라고 무시 했다면 지금의 태릉선수촌은 다른 곳에 세워졌을 것이다.

태릉선수촌은 박 대통령의 지시로 1965년 11월에 착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했다(지금은 국가대표 훈련원이 진천으로 옮겨가 진천훈련원으로 되어있다)

당시 한국 체육은 매우 열악했다.

대한체육회 1년 예산이래야 문교부 보조금 1억 원이 전부였었다.

지금처럼 각 경기단체의 국가보조도 없었고, 단지 경기단체장의 능력에 따라 각 종목 협회 연간 예산 액수가 달랐다.

당시 권력의 실세들이 각 종목협회장을 맡았는데, 사격의 박종규, 스케이트 김재규, 축구 장덕진, 배구 이낙선, 농구 이병희, 복싱 김택수 등이었다.

특히 박종규 씨는 1974년, 처음으로 국제대회(세계 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해서 1978년 세계 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 국제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경기력 향상 연구연금 실시

체육연금이라 불리는 ‘경기력 향상연구연금’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제3공화국’의 국민의 체력 향상을 시켜야 한다는 마인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의 체력을 전체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를 만들었고, 국민체육진흥법을 제정해서 직장체육, 학교체육, 엘리트 체육 등 분야별로 정책을 세워 시스템을 구축했다.

박 대통령은 1973년 ‘병역의무의 특별규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했고, 대한체육회는 이듬해 국제 대회 입상 가능자의 병역 면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1974년부터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에 대한 ‘종신연금’ 계획을 확정하여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이후 ‘종신연금’은 체육연금으로 바뀌어 경기력향상연구연금으로 명칭만 바뀌어 지금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다.

경기력향상연구기금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에게 평생 동안 지급된다. 올림픽 금메달은 100만원, 은메달 75만원 동메달 52만5천원이 매달 지급되고, 메달을 여러 개 따서 매달 수령액이 100만원이 넘으면 일시불로 준다.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는 올림픽 보다 점수배당이 낮아서 금메달 2개를 따야 최소연봉을 받을 수 있는 20점에 해당이 되고, 은메달과 동메달은 각각 2점과 1점밖에 안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