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정희 대통령이 지난 1971년 열린 제1회 박스컵 축구대회 개회식에 참석해 시구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은 힘이 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임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만 명의 유대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됐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었고, 그래서 그 나라의 스포츠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박스 컵과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탄생 시켜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이 최초로 탄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프로복싱은 1965년 12월, 서강일 선수가 처음으로 필리핀의 엘로르데 선수에게 WBA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잘 싸우고도 판정패를 당해 세계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1966년 6월 김기수는 당시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뉘티에 도전하기 위해 당시로는 거액인 5만5000달러가 필요했다. 타이틀 매치를 벌일 장소가 한국(장충체육관)이었기 때문에 세계 챔피언 벤베뉘티 선수에게 파이트머니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달러가 아쉬운 형편이었고, 외화를 쓰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이를 본 박 대통령이 5만5000달러에 대한 지불 보증을 지시하면서 세계타이틀 매치가 성사됐다.

김기수와 벤베뉘티는 구원(舊怨)의 관계였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웰터급 2회전에서 만나 김기수가 홈그라운드 벤베뉘티에 판정패를 당했다.

당시 한국은 외화를 절약하기 위해서 로마올림픽에 입상이 가능한 경량급 선수만 파견했는데, 중량급인 웰터급의 김기수 선수를 파견한 것을 보면 메달 입상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고 볼 수 있다.

김기수는 아시아권에서는 당할 선수가 없을 정도로 스피드와 기술이 뛰어났다. 벤베뉘티를 만나기 전까지 60전 이상을 싸우면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손을 모두 쓰고, 스피드가 뛰어나고, 상대의 공격을 허리를 약간 뒤로 제쳐 피했다가 곧바로 원투 스트레이트로 반격해 오는 벤베뉘티에 김기수가 3라운드 내내 끌려다니다가 판정패를 당했다.

김기수는 벤베뉘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로마 올림픽 때와는 달리 때리고 껴안는 작전으로 점수에서 앞서 나갔다. 15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두 선수는 사력을 다해 싸웠다.

경기 내용은 박빙이었지만 심판은 김기수 선수의 손을 들어줬다. 김 선수가 한국 프로복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에 오르자 링 사이드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박 대통령도 손뼉을 치며 격려를 해 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 후 1974년 홍수환 선수가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WBA 밴텀급 챔피언 아놀드 파머를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을 때도 청와대로 직접 불러서 격려금을 주기도 했다.

박스컵의 탄생과 발전

박스컵 축구대회는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과 태국의 킹스컵에 대항해 지난 1971년 만들어진 토종 국제축구대회다. 박 대통령 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로 창설된 이후 1975년까지 5년 동안 진행됐다.

첫해는 한국과 버마가 공동 우승을 차지했고, 1972년 버마, 1973년 버마-크메르 공동 우승 등 버마가 3연패를 차지하면서 강세를 보였다. 

한국은 1971년 최초로 단독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 후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동안 ‘박 대통령 컵 국제축구대회’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 배 국제축구대회로 변경되어 1993년까지 열렸다. (1986년은 서울 아시안게임 때문에 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1994년 한 해를 거른 후 1995년부터 1999년까지 5년 동안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로 열린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박스컵을 메르데카컵, 킹스컵과 함께 아시아 3대 국제축구대회로 불렀다. 그러나 일본은 1978년 창설한 기린컵을 메르데카컵, 킹스컵과 함께 아시아 3대 국제축구대회로 불렀다. 한국은 1978년 1회 참가해 3위를 기록했고, 일본도 박스컵에 1981년 단 한 번만 출전했다.

1976년 박스컵 개막전에서 한국이 말레이시아에 1대4로 뒤지다가 차범근이 후반 38분, 42분, 44분에 내리 3골을 넣어 4대4로 비긴 후 결승전까지 올라가 브라질 상파울루 주 프로리그 21세 이하 선발팀과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그 경기 이후 차범근은 아시아뿐 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관심을 끄는 선수가 되었다.

경제발전 위해 아시안게임 개최권 반납

박 대통령은 언제나 스포츠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은 우여곡절 끝에 1970년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권을 따냈다. 그동안 아시안게임은 인도, 필리핀,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열렸는데, 개발도상 국가였던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북한의 군사도발 위협이 존재하고, 국가 경제개발이 시급하기 때문에 과도한 개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벌금을 물고 개최권을 반납했다.

결국 1970년 아시안게임은 1966년 아시안게임을 개최했던 태국이 4년 만에 또다시 개최했다.

박 대통령은 골프를 즐겼다. 핸디 16 정도의 실력이었고, 골프 파트너는 김학렬 경제기획원 부총리, 박종규 경호실장 등이었다.

박 대통령은 어떤 스포츠라도 즉시 어울려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시찰을 나갔다가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직접 라켓을 잡고 배드민턴을 쳤다. 휴양지에서 육영수 여사와 장녀 박근혜 등의 가족과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이 자주 보도가 되었다.

진해 대통령 별장으로 떠난 휴가에서는 백사장에서 배구하는 경호원들과 수영복 차림으로 어울려 배구를 즐기기도 했다.

또한, 청와대에서 가끔 육영수 여사와 함께 운동 삼아 우리 활(국궁)을 쏘기도 했다. 승마를 한 기록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그저 탈 줄 아는 정도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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