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르공화국(現 콩고민주공화국) 모부투 대통령 방한 당시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지난 82년 6월 자이르공화국(現 콩고민주공화국) 모부투 대통령 방한 당시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은 힘이 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임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만 명의 유대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됐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고, 그 나라의 스포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월드컵 도중 경질된 두 감독들

전 세계의 모든 축구선수의 꿈은 지구촌 최고의 축구 잔치 월드컵 본선에 출전해서 한 경기라도 뛰어 보는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축구선수가 ‘월드컵 본선 출전’의 꿈을 갖고 축구공을 차기 시작하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의 꿈을 이루는 선수는 4년마다 736명뿐이다. 그것도 본선에 오르는 나라가 32개국(엔트리 23명)이 되었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부터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서 벤치에 앉아 감독하는 영광을 누리는 축구 감독은 4년에 겨우 32명씩 나온다. 1년에 8명인 셈이다.

그런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를 얻어 월드컵 본선 감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대표팀을 지휘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감독이 월드컵 역사상 단 2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불행하게도 한국의 차범근 감독이고, 또 한 명은 아프리카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디치 감독이다. 

차범근 감독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 예선 첫 경기에서 멕시코에 1대3으로 역전패당했다. 두 번째 맞붙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0대 5로 참패를 당하면서 현지에서 해임돼 중도 귀국해야 했다. 

한국 축구는 김평석 코치를 임시 사령탑으로 마지막 벨기에전을 치렀지만 1대1 무승부를 기록해 예선 탈락했다. 결과적으로 2연패 상황에서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대승을 거뒀더라도 탈락하기는 마찬가진데 왜 차범근 감독을 급히 경질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자이르의 비디치 감독의 중도 탈락은 차 감독의 경우와는 달랐다. 자이르는 1974년 서독월드컵 아프리카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1위를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

당시는 월드컵 본선 진출권이 16장뿐이었다. 특히 아프리카에는 한 장밖에 주어지지 않아서 본선에 오른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콩고의 비디치 감독, 유고戰 잘 싸우고도 경질돼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자이르는 2조에 속했다. 2조에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해 ‘월드컵 본선 3차례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된 축구의 나라 브라질과 동유럽의 축구 강국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스코틀랜드가 속해 있었다.

서독월드컵 개막전은 2조의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가 가졌다. 월드컵 개막 경기는 통상 개최국이 해 왔지만, 개최국인 서독은 월드컵 3번 우승으로 줄리메컵의 영구 소유권을 차지한 브라질에 양보했다.

그런데 브라질은 지난 대회 챔피언으로 월드컵을 완전히 소유한 팀의 위용을 갖고 있지 못했다. 축구황제 펠레를 비롯한 게르손, 토스타오 갖은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브라질 국가대표에서 은퇴했고, 펠레와 함께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공격을 이끌었었던 자일징요가 간판스타로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브라질은 개막전에서 졸전 끝에 유고슬라비아와 득점 없이 0대0으로 비겼다.

자이르는 6월 14일 벌어진 스코틀랜드와의 첫 경기에서 선전했지만 전반 26분 로리머, 전반 33분 조르단에 잇따라 2골을 허용해서 0대2로 패했다. 사실 자이르의 전력은 스코틀랜드와 4~5골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장 블라고예 비디치 감독이 벤치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그나마 2골 차로 줄인 것이다.

비디치 감독은 유고슬라비아(현재 세르비아-몬테네그로) 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은 비디치 감독을 전격적으로 해고했다. 비디치 감독이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 자기 나라와의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유고슬라비아 편을 들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나온 망측한 발상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우려된다면 수개월 전 유고슬라비아와 한 조로 편성되었었을 때 다비치 감독을 경질해야 했다. 그러나 엉뚱하게 1차전에서 선전을 한 디비치 감독을 전격적으로 경질한 것이다.

체육부 장관 경질하려 월드컵 대표 감독 맡겨

모부투라는 독재자의 한 마디에 자이르 팀의 단장으로 가 있던 체육부 장관이 졸지에 임시감독이 되었다.

자이르 팀은 ‘축구 문외한’인 체육부 장관이 감독이 되었으니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더구나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펄펄 날던 선수들이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는 뛰려 하지 않았다.

전반 17분까지 3골을 허용하자 체육부장관은 카자디 골키퍼를 투비알란두 선수로 교체했다. 골키퍼를 바꾸면 골을 덜 허용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골키퍼가 바뀌었지만 자이르의 골문은 유고슬라비아의 공격진에 마구 유린당해 전반전에만 3골을 더 허용했고, 그나마 후반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느슨한 플레이로 3골만 내 줘 0대9로 대패하고 말았다.

월드컵 본선에서 0대9의 스코어가 나온 것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한국이 푸스카스가 버티고 있는 헝가리에 0대9로 참패를 당한 이후 최다 점수 차의 완봉패였다. 

독재가 모부투의 어이없는 국수주의가 참극을 낳은 것이다.

모부투는 자이르가 유고슬라비아에 0대9, 핸드볼 스코어로 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현지에서 자신의 정적이었던 체육부장관을 경질했다. 모투부는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신에게 껄끄러웠던 야당 성향의 인사를 국무위원에 선임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체육부장관이었다.

체육부장관이 물러나자 자이르는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비교적 선전을 해서 3골만(0대3)을 내주고 패한 후 귀국 보따리를 쌌다. 

자이르는 그 후 월드컵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나 등의 경기력이 몰라보게 향상되는 동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이르의 월드컵 본선 성적은 3패에 한 골도 넣지 못하고 14골만을 허용, -14골로 기록되어 있다.

모부투는 뮌헨 월드컵 본선에서 참패를 당한 선수들이 귀국한 후, 자이르 국가를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서독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한 기념으로 하사했었던 집과 자가용들을 모두 몰수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모부투는 1982년6월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 한국을 방문한 바 있고, 한국은 모부투 대통령 방문 기념 우표까지 발행한 바 있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모부투는 결국 총으로 망했고, 1997년 망명지 라바트에서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의례 군부정권이 부패하듯, 재임 32년(1965~1997년) 동안 서아프리카, 브라질, 모로코 등에 호화 별장이나 저택을 마련하는 등 무려 50억 달러를 부정 축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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