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G 랜더스 구단주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뉴시스)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 건강한 여가선용을.”

1982년 프로야구 출범당시 슬로건이다. 지난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KBO)가 어느덧 4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울고 웃었고, 관중들과 시청자들이 그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200승 이상을 올린 투수와 400홈런을 넘긴 타자,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문 40(홈런)-40(도루)을 달성한 선수, 심지어 30승을 올린 투수도 있었다. 또한 세계신기록인 9경기 연속홈런의 자랑스러운 기록도 나왔다.

KBO리그에서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지구촌 최고의 야구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선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다가 KBO리그로 컴백한 선수도 생겨났다. 

초창기 선수들은 일반 직장인의 10년 치 연봉 2400만원이 최고였지만, 지금은 150억원(4년 동안)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도 나올 정도로 파이가 커졌다.

프로팀은 6팀에서 10팀으로 늘었고, 1998년 이후 외국 선수들도 합류해 프로야구의 ‘양과 질’이 매우 높아졌다. 명실상부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 40주년을 맞아 매주 수요일, 재미있고 의미 있는 40개의 스토리로 찾아뵐 예정이다. [편집자주]

 

SSG 정용진, 선발 투수 오원석에게 격려 메시지

지난 22일 오후, SSG 랜더스 오원석 투수는 모바일 메신저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정용진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메시지에는 "상대 선발 투수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공을 던져라"라는 따뜻한 격려가 담겼다. 구단주를 사칭하는 메시지겠거니, 설마 하는 마음에 무시해 버렸다. 

다음날, 추신수 선수가 “(정용진) 구단주님이 보낸 게 맞다”는 인증 아닌 인증을 해 주고 나서야 급히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 팀으로 맞붙을 LG트윈스의 앤드류 수아레즈는 5승 1패, 방어율 1점대로 국내외 투수를 통틀어 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로 꼽힌다. 그에 맞설 오원석 투수는 프로 데뷔 이후 선발승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만큼 구단주가 직접 힘을 실어준 셈이다.

좌완 유망주인 오원석 투수는 2020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이다. 6차례 선발 등판했지만, 선발승을 올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세상에 없던' 구단주의 응원 덕분일까. 오원석은 LG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프로 데뷔 후 가장 많은 공(101개)을 던졌으며, 6이닝 5안타 1볼넷 6삼진 무실점으로 첫 선발승을 거뒀다. 

그날 밤, 정 구단주의 SNS에는 "선발 첫 승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랜더스의 보석이 되어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오원석의 투구 사진이 게시됐다.

그뿐만 아니다. 그보다 앞선 지난 21일 인천 LG전에서는 문승원이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자 "문승원 6이닝 4피안타 1실점 호투. 짝짝짝"이라고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최정이 1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자 "마이 히어로"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정 구단주는 전폭적인 지지를 이어가면서도 야구단 운영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즌 시작 이후 야구단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는 구단 관계자의 설명이 전해진다.  

이처럼 든든한 구단주 '빽'을 둔 SSG는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을 유지해 오며 28승 18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창단 시 '세상에 없던 프로야구'를 선보이겠다던 약속을 지켜가는 셈이다.

OB(두산) 베어스 박용민 전 사장, 늘 솔선수범해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직전인 1981년 11월, OB(두산) 베어스 전 박용민 사장(초창기는 단장)은 연합통신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박 사장은 다음 해인 198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신설 프로야구단(OB 베어스)팀을 맡으라는 박용곤 회장의 엄명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고 프로야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OB(두산) 가(家)의 일원이었던 박 씨는 프로야구팀을 맡은 이후 3년 동안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당시 우리나라에서 메이저리그 등 외국 프로야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이호헌(초창기 KBO 사무총장)씨 집을 드나들며 프로야구 공부를 했다. 만약 이호헌 씨에게 설명을 듣고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직접 미국이나 일본 프로야구 기구나 팀을 찾아가 확인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는 자동차로 100만km가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선수들을 독려했고, 선수와 감독들을 직접 만나 견문을 넓혔다. 사장실에 앉아서 지시만 내리는 다른 팀의 임원들과는 격이 달랐다.

그 결과, 박 사장은 OB 베어스팀의 프로야구 원년 우승의 숨은 주역이 됐다. 원년 우승의 일등공신인 박철순(당시 밀워키 브루워스 더블에이)을 미국에서 데려왔고, 어린이 회원을 처음으로 모집했다.

뿐만 아니다. 프로야구 원년 우승에 만족하지 않고 2군 운영 전용 훈련장을 확보했고, 잠실야구장에 라커룸을 만들었다. 야구단에 메이저리그 방식을 가장 먼저 도입한 구단이기도 하다. 

두산 베어스가 오늘날 ‘화수분 야구’로 불리는 것은 박 사장이 기초를 탄탄하게 닦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박 사장은 마지막 직책은 엄연히 OB 베어스의 대주주인 사장이었지만 '단장'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OB 베어스팀을 맡을 때 공언했던 것과 같이 꼭 10년을 채우고서야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야구단과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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