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멕시코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브라질 선수들이 줄리메컵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사진=가디언 화면캡처)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은 힘이 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임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만 명의 유대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됐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고, 그 나라의 스포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메디치 대통령은 월드컵축구대회를 이용해서 독재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던 브라질 대통령이었다.

에밀리오 가라스타추 메디치 대통령은 1969년 대통령이 되었지만,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인권유린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고, 반정부 인사들은 수시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군사독재 정권을 이끌던 메디치 대통령은 정부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1970년에 벌어질 멕시코 월드컵 우승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이미 두 차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던 브라질, 이탈리아, 우루과이 세 나라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멕시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야 한다” 며 벼르고 있었다.

브라질은 1958년 스웨덴, 1962년 칠레, 우루과이는 1930년 우루과이, 1950년 브라질, 이탈리아는 1934년 이탈리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각각 두 번씩 우승을 차지했었다. 따라서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면 규정에 따라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줄리메컵’을 영원히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한다는 것은 ‘축구 최강국’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브라질 이탈리아 우루과이 세 나라 국민들은 멕시코 대회 우승을 그 어느 대회보다 간절하게 바라게 되었다.

국민들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고, 정통성이 없는 군부독재를 하던 메디치 대통령이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팀을 격려하기 위해 대통령 궁으로 초대했지만, 당시 브라질의 주앙 살다냐 대표팀 감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살다냐 감독은 메디치 대통령의 점심 초대에 맞춰 선수들의 연습 시간을 조정하지 않았다. 살다냐 감독은 메디치 대통령의 권위에 주눅이 들지 않고 대표 팀을 소신껏 이끌었다.

어느 날 브라질의 한 신문 기자들이 살다냐 감독에게 물었다. 

"왜 메디치 대통령이 좋아하는 다리우 선수를 대표 팀에 포함하지 않았느냐"

“나는 브라질 정부 관료를 뽑을 권한이 없다. 브라질 대통령도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선발할 수 없다.”

메디치 대통령은 결국 살다냐 감독을 경질했다. 그의 새로운 선택은 마리오 자갈루 감독이었다.

살다냐 감독 경질하고 자갈루 감독 임명이 신의 한 수

자갈루 감독은 1958년 스웨덴,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2연패를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다.

자갈루의 ‘형님 리더십’은 브라질 대표 선수들을 한마음으로 똘똘 뭉치게 했고, 브라질은 남미 예선부터 멕시코 월드컵 본선까지 전승 행진을 하며 막강전력을 발휘했다. 브라질은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에서 ‘가데나찌오’, 즉 자물쇠 수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수비진에 수모를 안기며 4대1로 이겨, 줄리메컵을 영원히 보유하게 되었다.

자갈로 감독은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자갈로 이후 독일의 베켄바우어가 두 번째로 선수, 감독으로 월드컵 정상의 맛을 봤다.

브라질의 멕시코 월드컵 우승은 ‘월드컵 사상 최초로 3번 우승’을 노렸던 우루과이, 이탈리아 두 팀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정상에 올랐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준결승전에서 3 대 1,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4대1로 각각 제압했다.

명장 자갈루 감독을 포함, 펠레, 자일징요, 게르손, 브라토, 알베르트, 리벨리노, 토스타오로 이루어진 1970년 멕시코월드컵 때의 브라질 멤버를 ‘역대 최강’팀으로 꼽는 축구 전문가들이 많다.

메디치 대통령은 브라질이 멕시코월드컵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자 국제전화를 걸어 선수 한명 한명을 일일이 치하했다. 

그가 선수들과 감격적인 전화 통화를 끝낸 후 대통령 관저 난간에 셔츠 바람으로 나와 삼바 멜로디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시민들이 관저로 몰려들었다. 메디치는 대통령 관저를 개방하라고 즉각 지시했고, 시민들과 메디치 대통령은 서로 얼싸안고 ‘브라질 만세’, ‘브라질 축구 만세’를 외쳤다.

그때 한 시민이 메디치에게 건의했다.

“대통령님 내일을 브라질 공휴일로 하시면 어떨까요?

월드컵 우승 직후 사흘 동안 공휴일 선포

“아니야, 내일 뿐만 아니라 모레 화요일까지 이틀 동안 브라질은 임시공휴일이야”라며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브라질 국민들과 메디치 대통령은 우승을 차지한 1970년 6월 21일 일요일부터 6월 23일 화요일까지 사흘 동안 ‘광란의 파티’를 벌였다.

사흘 동안의 각종 환영 행사에서 삼바리듬의 홍수 속에 폭죽, 총포, 추락, 심장마비 사고 등으로 무려 44명이 사망했고, 2000명 가까이 부상을 당했다.

그는 6월 23일 멕시코 영웅들이 귀국하는 갈레오 국제공항에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했다. 영원히 브라질의 것이 된 줄리메컵을 안고 귀국하는 브라질 선수단을 실은 특별기가 개선하기 때문이다.

갈레오 공항에 내려진 특별경계령을 뚫고 5000여 명의 시민들이 멕시코에서 개선장군이 되어서 귀국한 월드컵 대표 선수단을 끌어안고 감격적인 포옹을 했고, 갈레오 공항에서 리우데자네이로 도심까지 200만여 명의 시민들이 환영과 축배의 노래를 합창하며 브라질 만세를 외쳤다.

시민 가운데 일부는 ‘브라질 축구 만세’와 함께 ‘메디치 만세’를 외치기도 했고, 이를 전해 들은 메디치 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메디치 대통령은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 모두에게 캐딜락 승용차를 한 대씩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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