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보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양바이완의 사망을 추모하고 있다. (웨이버 캡처=조현선 기자)

[뉴시안= 조현선 기자]중국의 '워렌 버핏', 개인 투자자의 '신'으로 불리는 양화이딩(楊懷定)이 사망했다. 그는 본명 보다는'양바이완'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웨이보에 '中第一股民 楊百万去世(중국 제일의 주식투자자 양바이완 사망)' 관련 글 1억5000만여개가 게시되는 등 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다.

15일 바이두 등 중국 현지 매체에 따르면 양바이완은 13일(현지시각)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상하이 최초의 증권 투자자 중 한 명으로, 증권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1950년 출생한 양바이완은 1989년 주식 투자를 통해 100만 위안(약 1억7000만원)을 가진 부자가 되면서 '양바이완(백만, 百万)'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상하이 강소성에 위치한 철합금공장에서 직원으로 일했던 그의 월급은 약 60위안(약 1만원) 수준이었다.  당시 100만 위안은 서민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이었다.

앞서 1987년 무렵 그는 중국 정부가 상하이·충칭 등 7개 도시에서 국고채 거래시장을 개인투자자에게 시범 개방한다는 기사를 봤다. 동일한 상품임에도 거래소 간 가격이 다른 점을 이용하면 돈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지방은행(허페이)에서 산 국고채를 상하이 은행에 되파는 식이다. 

당시 휴직상태였던 그는 중국 국고채 거래가 시작되던 날 그는 아침 일찍 은행을 찾았다. 국고가 104위안에 거래되는 것을 발견한 그는 전 재산인 2만 위안(약 340만원)과 친인척에게 빌려서 마련한 자금 등 총 10만 위안(약 1700만원)을 모두 투자해 112위안에 되팔았다. 이날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약 800위안(약 14만원)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가 공장에서 근무하며 받던 월급의 12배 가량, 즉 연봉을 하루 만에 번 것이다. 

약 1년 간 국채 시장에서 100만 위안의 수입을 올린 그는 상하이증권거래소 설립과 동시에 주식시장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중국인들이 주식이라는 개념을 신뢰하지 않았던 탓에 주식시장에서 활동하는 중국인은 양바이완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가 '중국 최초의 주주'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는 "1990년말 상하이증권거래소 개장 첫날, 내 거래량이 전체 거래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전국에서 '주식의 신'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93년이다. 당시 상하이 주가지수는 400에서 1500으로 폭등했으며, 많은 이들이 1800까지 상승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양바이완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냉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주가는 1000 이하로 떨어졌고, 나중에서야 그가 1500에서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중국 현지에서는 양바이완이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국 주식 시장에서 실패하지 않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평정심 덕분이라고 봤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지혜 등은 현재의 투자자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칭송한다.

그는 1998년에는 중국 중앙TV에서 '중국 개혁개방 20주년 기념의 남자'로 선정됐으며, 미국 타임지 등에 실리기도 했다. 그가 가진 주식이 항상 언론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북경대와 칭화대 등 중국 명문 대학에서 특강 러브콜을 보냈으며,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했다. 1994년 심양재경대학은 중졸 출신의 그를 금융학과 교수로 고용하기도 했다. 

양바이완은 생전에 "나는 주식의 신이 아니며, 주식 비평가도 아니다. 나는 평범한 소액 투자자이다. 소액 투자자가 되는 것은 슬프지 않지만 어리석은 소액 투자자가 되는 것은 슬프다", "주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야 한다. 현실적인 것이 승리의 비법이다", "주식 시장의 핵심은 바닥을 사냥하고, 정상을 피하는 것에 있다"는 등의 발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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